1. 첫 번째 비밀_예수님의 잠

첫 번째 비밀:
예수님의 잠
(침몰 직전의 배에서도 편히 잘 수 있는 방법)

갈릴리 호수


한 호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호수가 매우 넓어서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배 한 척이 이 호수의 한쪽 편에서 반대편으로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이 배에는 12명의 제자와 한 분 선생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12명의 제자 대부분은 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선생님은 한때 목수셨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고, 선생님은 배의 뒷부분, 즉 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가 앞으로 상당히 나갔을 때, 갑자기 큰 돌풍이 불었습니다. 이 호수에는 주변 산에서 오는 찬 기류와 호수의 따뜻한 기류가 만나 이런 돌풍이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이런 돌풍은 어부 출신인 제자들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선생님이 탄 배에 불어 닥친 돌풍은 강력했습니다. 돌풍은 미친 듯이 불었기 때문에 광풍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였습니다. 돌풍에 의해 큰 물결(큰 파도)이 일어났습니다. 큰 물결은 배에 부딪혀 배로 밀려들었습니다. 이제 배가 침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허둥대면서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제자들은 배에 들어온 물을 퍼내면서, 돌풍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상황은 더 위급해졌습니다. 배가 침몰하려고 기울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제자들 대부분은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지만, 배가 곧 침몰할 상황이 되자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여전히 잠을 자셨습니다. 선생님이 주무시고 계신 고물 쪽도 위급한 상황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선생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않으십니까?”

선생님은 목수 출신이었고, 제자들 대부분은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 목수 출신인 선생님에게 배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이 말이 될까요? 배가 침몰할 상황에서 수영이나 제대로 할지 의심스러운 목수 출신 선생님이 고물을 베고 태평하게 잠을 잔다는 것이 말이 될까요?




배가 침몰할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성경에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실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이 약간씩 다른 데, 이것은 어떤 사건에 대해 A 신문사 기자, B 신문사 기자, 그리고 C 신문사 기자가 기사를 쓸 때, 각 기자의 특성 및 관점과 성향 등에 따라 기사의 내용이 약간씩 다른 것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면, 같은 호수(갈릴리 호수)를 마태와 마가는 바다라고 했고, 의사였던 누가는 호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8:23-27 (표준새번역 성경):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

마가복음 4:35-41 (표준새번역 성경):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께서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큰 광풍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깨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해져라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누가복음 8:22-25 (표준새번역 성경):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셔서,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시니, 그들이 떠났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런데 사나운 바람이 호수로 내리 불어서, 배에 물이 차고, 그들은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고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깨어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시니, 바람과 물결이 곧 그치고 잔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서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을 호령하시니, 그것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할까?” 하였다.

위의 성경 내용을 보면, 참 놀랐습니다. 잠에서 깬 선생님(예수님)은 광풍을 향해, 마치 초등학교 교실에서 개구쟁이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신없이 소란을 피울 때, 선생님이 이제 그만 조용하고 말하듯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라고 말했더니 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교회에서 자주 듣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는 친숙한 내용이지만, 일반인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기독교인에게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라고 물으면, 기독교인은 뭐라고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일반인은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기독교인이 하는 이야기를 철이 덜 든 사람이 하는 이야기 정도로 취급합니다. 일반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야기에 귀를 막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과 일반인의 관심이 상당히 다르므로 이들 간에는 오해와 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 간에는 서로 이런 말들로 상대방을 쑥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인이 일반인에게 이제 그만 방황하고 사람(, 하나님의 자녀) 좀 되시지요.”라고 권면하면, 일반인은 기독교인에게 동화나 신화 같은 이야기(, 성경 내용)에 속지 말고 철 좀 드시지요.”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만일 이들이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휘몰아치면, 이들 모두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면 기독교인이든 일반인이든 상관없이 느끼는 두려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도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수많은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은 2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사업이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하면서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생각한 대로 잘 자랄 것인지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청년 중에는 결혼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도 합니다. 결혼한 사람은 결혼 생활이 마지막까지 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미래의 불확실성에 오는 두려움은 다양하고 많습니다. 어떤 심리학자에 의하면 이런 두려움은 육백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인간이면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고, 통상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반면 특이한 두려움이 있는데, 이 두려움은 진정한 두려움, 건전한 두려움, 건강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이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경외감, awe)이라고도 합니다. 면접시험 전에 느끼는 두려움은 해로운 두려움이지만,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웅장하고 거대한 폭포를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감입니다.



웅장하고 거대한 폭포를 보면서 느끼는 두려움은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감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우면 대부분 소극적이 되고 위축됩니다. 쪼그라들기도 합니다. 어디론가 도망가기도 합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묶입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을 경배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원시인들은 뱀, 사자, , 귀신 등을 두려워하여 이것들을 경배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것에 지배당합니다.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면, 그 사람에게 지배당합니다. 권력을 두려워하면, 권력에 지배당합니다. 돈을 두려워하면, 돈에 지배당합니다.

두려움에는 크기가 있습니다. 뱀보다는 사자가 더 큰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영상으로 볼 때보다 직접 가서 볼 때 더 큰 경외감을 느낍니다. 큰 두려움은 작은 두려움을 소멸시킵니다. 10,000명의 관객이 있는 무대에서 두려워 떨었던 가수는 100명의 관객이 있는 무대는 그다지 두렵지 않습니다.

큰 두려움에 지배당하면, 작은 두려움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두려움만이 아니고 모든 것에 이 원리는 작용합니다. 좋은 옷이 생기면, 낡은 옷에는 더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고급 차가 생기면, 값싼 차에는 더는 관심이 없게 됩니다. 영적인 깨달음의 기쁨을 맛본 사람은 예전에 자기가 왜 술, 담배를 좋아했는지 의아해합니다. 이점을 이해하면, 우리 삶에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인식할 수 있거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핵폭탄입니까, 전쟁입니까? 아니면 태풍입니까, 지진입니까? 대학 입학시험입니까? 이런 식으로 물으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개인마다 느끼는 두려운 정도도 다르므로 모두가 수긍할 만한 것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핵폭탄이 무섭습니까, 그것을 만든 천재 과학자가 무섭습니까? 전쟁이 무섭습니까,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무섭습니까? 어떤 사람은 핵폭탄과 전쟁이 무섭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핵폭탄은 그것을 만든 사람(또는 집단)에 의해 해체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전쟁 또한 그것을 일으킨 사람(또는 집단)이 중단시킬 수 있으므로 그렇게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만들어진 것(피조물)은 그것을 만든 존재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만든 존재는 만든 것을 폐기할 수 있으므로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칼을 만든 대장장이는 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없애 버립니다. 이처럼 만든 존재에게 만들어진 것은 아무런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어려운 수학 문제는 학생들에게 두려운 대상이 될지 몰라도 그 수학 문제를 만든 선생님에게는 전혀 두려운 대상이 아닙니다. 공포 영화는 관객들을 두려움과 공포로 떨게 하지만, 그것을 만든 감독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단 하나의 예외가 있어도 진리가 되지 않는다.”라는 논리학의 규정에 따르면, 만들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최고의 두려운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 만들어진 것은 만든 사람에게만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므로 만들어진 어떤 것도 최고의 두려운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피조된) 어떤 것도 최고의 두려운 대상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두려운 대상은 만든 존재(창작자) 중에 있어야 합니다. 만든 존재는 누구입니까? 사람입니까? 사람이 자연을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우주를 만들었습니까?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이 창작자입니까? 우주가 창작자입니까?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점, ‘창작자는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인격적 존재여야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창작자는 목적을 가지고 창작할 수 있습니다.

창작자는 목적을 가지고 피조물을 창작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연과 우주를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고 주장하거나 가르친 사람은 - 정신병자, 미친 사람은 제외하고 -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총동원해도 자연과 우주가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자연과 우주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럼, 도대체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창작자는 누구입니까?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그런 분은 딱 한 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입니다. 이 주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최고의 두려운 대상을 찾는 중이므로 이 주장에 대한 논란은 잠시 잊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유일한 창작자는 하나님이고, 따라서 최고의 두려운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전제하에 앞으로 더 나아가겠습니다.

앞에서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에 지배당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큰 두려움은 작은 두려움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가 최고의 두려운 대상인 창작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은 우리의 삶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최고의 두려운 대상인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어떤 것도 두려운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최고의 두려운 대상인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됩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 것인지? 아니면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여 세상의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된 자유의 삶을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광풍으로 침몰 직전인 배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호수에서 광풍 때문에 발생한 거센 파도가 배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배가 침몰할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제자들은 광풍과 거센 파도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자들은, 광풍을 볼 때 두렵고, 거친 파도를 볼 때 두렵고, 배로 밀려 들어오는 엄청난 물을 볼 때 두렵고, 그로 인해 잠시 후에 배가 침몰하여 죽게 될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허둥대다가 배 뒤쪽 한구석에서 편히 자고 계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잠자고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 순간, 제자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실낱같은 희망도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절박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예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예수님께 있다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기 전에, 군중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가르치신 후,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시고 먼저 배에 올라타셨고, 제자들은 엉겁결에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타고 호수를 건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했는데, 광풍이 몰아쳐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미안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잠만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제자들은 이런 원망 섞인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예수님 때문에 이런 상황을 맞게 됐으니까, 혹시 예수님께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알고 계실지 몰라?’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다급히 깨웠습니다. 제자들이 깨우자 예수님은 즉시 일어나셨습니다. 평안하게 잠을 잘 자는 사람은 잠에서 깰 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우자 지체없이 일어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평안하게 잠을 잘 주무셨던 분입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잠에서 깰 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벌떡 일어납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상황을 파악하시고, 광풍과 파도를 향해, 마치 조련사가 거칠게 날뛰는 야생마의 고삐를 잡고 진정시키듯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신기하게도 그 즉시 광풍은 그치고, 호수는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이 행한 이런 기적 이야기를 대할 때, 기독교인은 별 거부감 없이 믿지만, 일반인은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기적을 믿기 위해서는 건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제자들도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광풍과 파도를 제압하신 후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믿음을 그냥 믿음이라 하지 않고, ‘건전한 믿음이라고 굳이 표현한 이유는 맹신 또는 광신과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건전한 믿음은 앎과 이해를 기초로 합니다. 건전한 믿음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하지만, 맹신과 광신은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감정적으로 믿고 따르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기적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로 건전한 믿음과 맹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주장은 맹신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믿으면 이해된다.”라는 논리로 먼저 믿을 것을 주장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건전한 믿음과 이해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불신앙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맹신과 광신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 기적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와 그 기적의 가능성을 알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라고 명령하시자, 돌풍과 파도가 명령을 알아들은 것처럼 즉시 잔잔해지고 고요해졌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기적이 솔직히 이해되십니까?

최근 전자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라 음성 인식장치가 개발되어 보안이 필요한 장소, 예를 들면 연구소 출입문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연구소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음성 인식장치에 명령하면, 음성 인식장치는 이 사람의 음성과 일치하는 음성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합니다. 만일 일치하는 음성 데이터가 있으면, 음성 인식장치는 출입문을 열고, 그렇지 않으면 출입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돌풍과 파도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창조주의 음성을 인식하는 코드가 저장되어 있다고 가정하면(마치, 모든 생명체의 세포에 유전자 암호(DNA)가 있듯이), 돌풍과 파도를 잠잠하게 한 예수님의 기적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혹시, 음성 인식장치 개발자가, 돌풍과 파도를 잠잠하게 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음성 인식장치를 개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에 동의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의 원재료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의 한 위격이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세분 하나님(성부, 성자, 성령) 중의 한 분이십니다.

돌풍과 파도도 일종의 피조물이므로 예수님은 돌풍과 파도에 자신의 음성에 반응하는 음성 코드를 심어 놓으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풍과 파도에 대해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라고 말씀하시자 음성 인식장치가 음성을 인식하여 동작하듯이 돌풍과 파도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움직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모든 피조물에 예수님의 음성을 인식하는 코드가 숨겨져 있고, 우리가 그것을 예수님처럼 알 수 있다면, 각종 ()’도 말로 고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가능성은 세포로 이루어진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네 종류의 글자(A, T, C, G)로 표시되는 DNA 물질로 구성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 유전자에는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 있고, 이 정보는 바로 네 종류의 글자(A, T, C, G)로 이루어진 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광풍과 파도가 예수님의 명령으로 잔잔하게 되자,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제자들은 광풍과 파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 제자들은 광풍과 파도까지도 복종하는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인식한 것입니다.

광풍과 파도에 대한 두려움은 제자들의 마음과 정신에 악영향을 미치는 해로운 두려움입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은 제자들의 영혼육을 살리는 거룩한 두려움, 즉 경외감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살리는 작용을 하지만, 해로운 두려움은 파괴하고 죽이는 작용을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을 때,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이신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 눈앞에 있었던 두려움(광풍, 파도)은 사라졌습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존재를 인식하고 그 존재에 의존하면, 두려움은 사라지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체험한 것입니다.

광풍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행 신호등이 파란색일 때, 자동차가 멈춘다는 믿음이 없으면,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은 달려오는 자동차를 볼 때 두려울 것입니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은 우리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믿음이 없으면, 동물원 관람객들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발사가 가위와 칼을 가지고 머리와 수염을 자를 때, 이발사가 가위와 칼을 가지고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머리와 목을 이발사에게 맡길 때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발사가 가위와 칼로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없으면,
머리와 얼굴과 목을 이발사에게 맡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책망은 믿음이 없으므로 두려운 것이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무슨 믿음이 없다는 말씀이셨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믿음, 특히 기독교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해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일한 것의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면 알수록 그에 대한 믿음도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의 구성(구조)과 물에 대한 성질을 알면 알수록 우리 몸은 물에 뜬다는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종의 귀납적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먼저 믿고 나가면 우리는 그만큼 더 많이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노력하면 언젠가는 영어를 잘하게 된다는 믿음이 있으면,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결국은 그만큼 영어를 더 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 신뢰에 근거해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이 곧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왜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느냐? 왜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라는 책망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돌풍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질문은 뻔한 질문 아니냐며,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도록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이십니다.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모두 맞는 답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은 여러분의 관심 대상인가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계신가요? 교회에 가면 늘 예수 그리스도가 언급되므로 모든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많은 기독교인, 심지어 목사들도, 자기 삶의 목적, 종교적 목적 등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할 뿐이지 예수님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에 있었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질문에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라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진정으로 삶의 중심에 두고 생활한다면, 세상의 어떤 돌풍과 파도가 있어도 예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에 근거해서 다른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침몰 직전의 배 뒤편에서 평안하게 잠들어 계셨던 예수님께 다시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침몰 직전의 배에서 태평스럽게 주무신 신비를 밝혀보려고 지금까지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를 알아보았고, 돌풍과 파도를 복종시키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주무실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운 상태에서는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잠잘 때 심하게 흔들리면 일어나게 되지 잠을 계속 자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돌풍과 파도에 의해 배가 몹시 흔들리는 두려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태평스럽게 잠을 자셨습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발할 때, 꽤 많은 승객이 타고 있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출발 후 어느 정도 가다가, 버스 운전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난폭 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난폭 운전으로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급정차와 급출발로 승객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승객들은 사고가 날까 봐 두려웠습니다. 승객 중 몇 명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인데도 미리 내렸습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스 운전사는 난폭 운전을 계속했습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도저히 그 버스를 타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버스 뒤편에서 이상한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한 소년이 편한 자세로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마치 아빠가 요람을 흔들어 주는 것처럼 즐기는 듯했습니다. 그 장면을 목격한 한 승객은 난폭 운전 상태를 알려주려고 그 소년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너는 어떻게 이런 난폭운전 버스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잠을 잘 수 있냐? 무섭지도 않냐? 사고가 날지 모르니까, 어서 내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아요.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는 아빠를 믿어요. 운전하시는 분은 저의 아빠거든요.”

소년은 아빠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아빠가 비록 난폭운전을 하셔도 아들이 타고 있는데 어쩌겠냐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면, 배짱이 생기고, 평안해집니다. 믿음이 있으면, 조건과 상황에서 자유롭고, 결국 그 상황을 즐깁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에서, 운전사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보다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그 상황을 즐길 수 있습니다. 난폭 운전 버스에서 일반 승객들은 운전사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지만, 아들은 흔들리는 요람 정도로 생각해서 태평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 셨습니다. 배가 돌풍과 파도로 심하게 흔들렸지만, 예수님은 마치 소년이 아빠를 믿고 평안하게 잠을 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운전하고 계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믿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광풍 속에서 흔들리는 배는 예수님에게 지구(地球)라는 놀이동산의 놀이용 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놀이동산의 놀이용 배가 심하게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손님들이 더 재미있어하듯이 예수님도 광풍 속의 배에서 속으로 신나 하셨을지 모릅니다.

광풍 속에서 흔들리는 배는
예수님에게 놀이동산의 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잠을 잘 자기 위한 조건으로 믿음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일반인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이 안 올 때 취하는 방법도 기독교인이 일반인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이 안 올 때, 일반인은 심리적 안정을 취하기 위해 심호흡을 하거나, 숫자를 거꾸로 세거나, 잔잔한 호수를 상상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부탁할 수 있는 대상, 즉 하나님께 잠을 부탁하면 됩니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서 부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부탁받은 것을 할 능력이 있으면 대개 들어 준다고 합니다. ,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면, 대부분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1,000만 원이 있고, 친구가 10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저는 기꺼이 빌려줍니다. 제가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은 제가 빌려줄 능력이 있고, 또한 친구와 친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엇이든 부탁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배에서 주무실 때 하나님께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몰 직전의 배에서 주무신 것은 피곤하신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으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하면, 부탁을 들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탁하는 사람에게 해로운 것까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아기가 칼을 달라 하면, 부모는 칼을 줄 능력이 있지만, 아기에게 칼을 주지 않습니다. 칼은 아기에게 해로운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용돈으로 100만 원을 달라 하면, 부모는 - 상식이 있는 부모라면 - 줄 능력이 있다 해도 아이에게 용돈 100만 원을 주지 않습니다. 100만 원 정도의 큰돈은 어린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잠이 들게 해 주세요.”라는 부탁은 즉각 들어주셔도,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기독교인은 기도(祈禱)로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기독교에서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왜 이 말로 기도를 마무리할까요? 직장에서 부하 직원이 상사에게 부탁하면, 잘 안 들어주지만, 사장님이 시켜서 하는 부탁이라고 하면, 즉시 들어줍니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등병이 대위에게 대령이 시켜서 하는 부탁이라고 하면, 대위는 이등병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하나님은 다른 어떤 부탁보다도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면 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잠을 잘 자기 위한 유리한 점은 다음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Immanuel)의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그 자체가 기쁨이고 평안이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낯선 곳에 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친구와 낯선 곳에 갈 때는 흥분되고 즐겁습니다. 친구와 낯선 곳에 가는 것이 흥분되고 즐거운 이유는, 단지 친구와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혼자 밤길을 갈 때, 저쪽에서 여러 명이 같이 오면, 혼자인 사람은 괜히 위축되고 두렵게 됩니다. 아이가 혼자 있을 때는 개구쟁이들에게 위축되어 놀림도 받고 얻어맞기도 하지만, 아빠와 함께 있으면 개구쟁이들은 그 아이에게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늘 함께 지내던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가고, 남편은 직장 일 때문에 집에 혼자 남게 되면, 남편은 대개 외롭고 쓸쓸해서 - 때에 따라서는 무섭기도 해서 - 잠을 잘 자지 못합니다. 집이 넓고 클 때 더 그렇습니다. 이럴 때 많은 남편은 잠들기 위해 독한 술을 마시거나 때에 따라서는 수면제를 먹기도 합니다.
잠이 안 올 때,
일반인들은 술을 마시거나 수면제를 복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한다라는 믿음이 있는 기독교인은,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서 단잠을 자듯이, 평안한 상태에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잠잘 때 부모는 아이들이 잘 자는지 확인하고, 이불을 덮어 줍니다. 여름에 아이가 자면서 땀을 흘리면 엄마는 부채질로 땀을 식혀줍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풍랑으로 흔들리는 배에서 평안히 주무셨습니다. 흔들리는 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마련한 큰 요람이었습니다. 풍랑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안심시키기 위한 부채질이었습니다.

풍랑으로 흔들리는 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 마련한 요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침몰 직전의 배에서 태평하게 잘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니까,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니까, 그분 자체가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처럼 나 이외의 것과 하나가 되는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참으로 중요합니다.

실력 있는 축구선수의 경기 장면을 보면, 실력 없는 선수보다 공이 선수 몸에 거의 붙어 있습니다. 선수가 공을 몰고 들어갈 때, 공이 선수와 거의 한 몸이 되어 움직입니다.

훌륭한 운동선수를 보면, 그 선수는 경기를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경기 자체를 즐깁니다. 뭔가를 즐기지 않으면, 그것과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서로를 즐기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제1 문답에서도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포함시켰습니다. 참다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하나이셨듯이, 하나님을 늘 즐거워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두려움은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 쓸데없는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와 나 아닌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것과 아닌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정복자도 전 세계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일설에 더는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울었다.”라고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땅은 유럽 일부와 인도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내 것과 아닌 것이 있으므로 두려움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 대개는 불편하고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집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 사용하다가 망가뜨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잘 알지 못하는 물건이 있으면, 불편함과 두려움은 더해집니다. 그 집에 있는 물건 중에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물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물건이 자기 맘에 안 든다고 해서 또 자기가 모르는 물건이라고 해서 주인에게 불평하거나 갖다 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집 주인의 필요 때문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집에서 불편함과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머무를 방법은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있는 어떤 것도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진작에 갖다 버렸거나 아예 처음부터 집에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즐깁니다.

우리가 타국(他國)을 갈 때도 두렵고 불안합니다. 그 이유도 타인의 집에 갈 때 불편하고 두려운 이유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나라 갈 때도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그 나라에 대해 알고, 그 나라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즐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뒤의 세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왜 그것들이 존재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전혀 쓸모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난, 고통, 질병이 있습니다. 전쟁도 있고 싸움도 있습니다. 모기도 있고 바퀴벌레도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왜 존재하는지, 우리 인간들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알기 위해 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학문이 있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한 두려움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피조된 것들이고, 세상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창조주가 하나님이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 그것이 광풍이든 파도든 상관없이 다 필요하므로 있는 것들입니다. 그 필요한 이유는 우리 인간이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는 손님이 방문한 집에서 어떤 물건을 처음 봤을 때, 손님은 그 물건이 그 집에 있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 물건이 필요하므로 집에 둔 것입니다. 손님이 그 필요한 이유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직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이 세상에 악이 왜 존재하고, 모기가 왜 있고, 가난과 고통이 왜 있는지 등등은 하나님께 직접 물어봐야 그 이유를 가장 빨리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인간은 가장 빠른 길을 외면한 채 어려운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 경우 인간은 실력 없는 학생과 비슷합니다. 실력 없는 학생은 문제의 해답을 선생님께 여쭙기보다 부담 없는 친구에게 물어보고 같이 헤매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주 만물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필요하므로 창조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피조된 모든 것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는 마치 발명가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발명가는 자신의 발명품을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공포 소설을 쓴 작가는 공포 소설 속의 사건과 등장인물들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광풍과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태평하게 잘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 협력하여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발명가가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듯이 공포소설 작가가 자신의 공포 소설의 내용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듯이 이 우주 만물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남의 집에 갔을 때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집주인처럼 그 집에 대해 알아야 하고,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두려움 없이 살아가려면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처럼 알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나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또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비밀: 예수님의 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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