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곱 번째 비밀_요나의 잠

일곱 번째 비밀:
요나의 잠
(잠을 잘 자려면, 세계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반면교사(反面敎師)’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라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잘못된 것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공원에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을 보고, ‘나는 저런 몰상식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하면, ‘공원에서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반면교사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반면교사와 비슷한 뜻으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말이 있습니다. 타산지석은 동양의 고전인 시경에 나오는 말로서, “다른 산의 보잘것없는 돌이라도 자기의 옥()을 가는 데에 쓸모가 있다.”라는 뜻입니다. “본이 되지 않은 남의 말이나 행동도 자신의 지식과 인격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게임만 하는 형을 아버지가 혼내자, 이를 보고 동생이 열심히 공부하면, 형의 행동이 동생에게 타산지석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다양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중에 요나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참고로,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이 있습니다. 보통 비둘기하면, ‘평화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런 까닭에 세계평화를 상징하는 세계 지도에도 비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비둘기는 비교적 충성스럽고, 순수하고, 얌전한 것으로 언급됩니다. 비둘기는 전령(傳令)의 역할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비둘기를 통신수단으로 이용했었습니다.

요나를 뜻하는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요나라는 이름에 걸맞게 요나는 비둘기와 연관성 있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구약 성경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고대 아시리아(Assyria)의 수도)에 가서 심판 예언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심판 예언을 듣고 회개할 수 있도록 요나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니느웨 사이에 평화를 회복시키는 것이 요나의 역할이었습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성경에서는 앗수르라고 함)에 전쟁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요나 1 2, 표준새번역 성경)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는 자신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듣고 불만이 생겼습니다. 사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켜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민이 적국인 독일의 패망을 원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고, 욥바(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의 항구로 가서 니느웨와는 정반대인 다시스(지금의 스페인 지역) 행 배를 탔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니느웨의 반대 방향으로 가면, 하나님을 피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배를 탄 요나는 배 밑으로 내려가 잠을 청했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항해를 얼마 동안 하다가 위험에 빠졌습니다. 태풍이 몰려온 것입니다. 뱃사람들(선원들과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태풍에 배가 침몰할 것 같아 두려웠습니다. 뱃사람들은 배를 가볍게 하면, 태풍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렇게 해도 배가 태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뱃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을 부르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습니다.

이 같은 위험한 상황에도 요나는 깊이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런 요나를 발견한 선장은 요나를 향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소? 잠을 자고 있다니!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 6,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소리쳤습니다. 요나는 선장의 고함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풍이 멈추질 않자, 뱃사람들은 태풍이 왜 왔는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비뽑기했고, 요나가 제비뽑기에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제비뽑기를 통해서 요나가 저지른 불순종이 드러나게 할 작정이셨습니다. 제비뽑기에 걸린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도망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어떻게 하면 이 태풍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지 물었습니다. 요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시오. 그러면 당신들 앞의 저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오. 바로 나 때문에 이 태풍이 당신들에게 닥쳤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소.”(요나 1 12,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말했습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지만, 뱃사람들은 차마 요나를 바다에 던질 수 없었습니다. 뱃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태풍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애썼습니다. 그런데도 속절없이 배가 태풍에 휩쓸려 침몰당할 긴박한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로 인해
배가 태풍에 휩쓸려 침몰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국, 뱃사람들은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요나 1 14,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 다음, 뱃사람들은 요나를 들어서 큰 파도가 치는 바다로 던졌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떨어지자, 태풍이 순식간에 잔잔해졌습니다.

한편, 요나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큰 물고기가 나타나 요나를 삼켰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는 그곳에서 사흘 밤낮을 갇혀있으면서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뉘우치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령을 내려 요나를 땅으로 토해 내게 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에게 하나님은 다시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이제 내가 너에게 한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요나 3 2,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느웨로 간 요나는 온종일 걸으면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요나 34,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뜻밖에도 요나가 외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기 위해 스스로 금식을 선포하고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습니다. 이 소식은 니느웨 왕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 니느웨 왕도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뉘우치는 마음으로 왕좌에서 일어나 왕의 옷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은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다음, 니느웨 왕은 백성에게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무엇을 먹어도 안 되고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7절에서 9,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니느웨 왕과 백성들이 뉘우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경고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요나의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여러분은 요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요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요나의 행동에 공감하는 부분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무리한 행동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런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조직 폭력배 집단에 가서 너희들의 폭력과 죄악이 크니 40일이 지나면 너희들 모두 감옥에 갇혀 죽을 때까지 그곳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외쳐라.” 이런 명령을 받은 목사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까요? 요나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었습니다.

요나가 살았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인 선지자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나라(이방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자기 민족에게 심판을 선언해도 죽이려고 하는 판국에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일은 위험하기도 했고, 조롱받기도 쉬웠습니다. 아마, 요나는 이 명령을 받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 명령일까?’ 하고 의아해했을지 모릅니다.

요나는 당시에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던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원했습니다. 앗수르는 오랫동안 이웃 나라들을 매우 포학하고 잔인하게 대했습니다. 앗수르군이 점령한 지역은 예외 없이 큰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앗수르 군인들은 포로들의 해골로 탑을 쌓거나, 입을 찢어 혀를 뽑거나, 때로는 포로들을 기름에 끓여 죽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행여나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나는 하나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요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심판 메시지를 전하지 않으려고 니느웨의 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무작정 욥바라는 항구로 갔던 것입니다.

욥바 항구에 도착하자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편을 확인했습니다. 때마침 다시스행 배가 있었습니다. 요나는 얼른 다시스행 표를 샀습니다. 그리곤 다시스행 배에 올라탔습니다. 다시스행 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요나는 마음이 두근두근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잡히지 않을까 해서 배를 탈 때까지만 해도 요나는 상당히 초조했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배를 탔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이제 뱃고동을 울리면서 욥바 항구를 빠져나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초반에 순항했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자기가 도망가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요나가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기로 작정하고 욥바 항에 도착하자자기가 가고자 했던 다시스행 배가 미리 준비된 듯이 있었고, 배 또한 순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을 피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허탈감과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 그런 것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요나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지속하였던 긴장과 스트레스도 풀렸습니다. 요나는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동안 혹시 하나님께 발견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가능한 자신을 깊이 숨기기 위해 배의 가장 밑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요나는 배의 가장 밑층까지 하나님의 시야가 미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배 밑층에서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요나는 배의 목적지인 다시스에서의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요나가 잠을 청하자, 요나는 금세 깊이 잠들었습니다

요나가 잠을 청하자, 요나는 금세 깊이 잠들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잠을 청한다라는 우리말 표현은 잠이 들기를 바라다 또는 잠이 들도록 노력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잠이 들기를…, 잠이 들도록…”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보면, 잠은 밖에서 속이나 안으로 오는 것입니다. , 잠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잠을 청한다라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잠을 부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에게 잠을 부탁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부탁할 때, 그것을 가지고 있거나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에게 합니다. 부탁하는 존재보다 부탁을 받는 존재가 더 뛰어난 능력자이거나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돈이 필요하면, 돈을 가지고 계신 부모님에게 돈을 달라고 부탁하지, 돈이 없는 친구에게 부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탁합니다.

부탁을 들어주느냐 마느냐는 부탁받은 사람의 권한입니다. 자녀가 돈을 달라고 요청하면, 상식적인 부모님은 돈을 무조건 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돈을 주기 전에, 그 돈이 자녀에게 유익하게 사용될지 판단합니다. 학생이 수학 문제를 풀어 달라고 부탁하면, 선생님은 학생이 그 문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풀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을 청할 때, 도대체 누구에게 잠을 청하는 것일까요? 잠을 청했을 경우, 잠을 줄 수 있고, 잠을 자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요?

우리가 을 청할 때,
누구에게 잠을 청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에게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처럼 잠을 청하는 존재인 다른 인간에게 잠을 청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 혹은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존재만이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잠을 청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잠을 청한다라고 할 때, 인간은 (무의식중에) 하나님께 잠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나가 배의 가장 밑층에서 잠을 청했을 때, 요나를 깊이 잠들게 한 것은 하나님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고 판단합니다. 요나에게 앞으로 있을 일,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서 견뎌야 하고, 니느웨로 걸어가야 할 일 등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요나가 깊이 잘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청했고, 잠깐이지만 하나님의 허락 하에 단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또는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면, 낭패와 좌절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요나는 배에서 잠을 청하여 잠깐 하나님의 배려로 깊이 잠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요나를 깨우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의 잠을 깨우는 방법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태풍을 일으켜 배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뱃사람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부르짖었고,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실은 짐을 바다에 미련 없이 던졌습니다. 선장은 바다에 버릴 짐을 찾기 위해 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깊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러 깨웠습니다. 선장은 밖에는 태풍 때문에 난리인데, 요나가 태평스럽게 잠을 자는 게 못마땅해서 깨운 것일까요?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람선에 폭탄이 설치된 사실이 알려집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승객들은 두려움에 떱니다. 그런데 승객 중의 한 명은 폭탄이 설치된 사실을 듣고도 유람선의 한쪽 구석으로 가 의자에 걸터앉아 태평하게 잠을 잡니다. 폭탄이 설치된 유람선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미친 사람 아니면, 폭탄과 연관된 사람이지 않을까요? 유람선에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그 사람이 한 언행을 생각하면, 미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폭탄과 연루된 사람으로, 폭탄을 해체할 수 있거나, 그 폭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폭과 연루되지 않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설치된 유람선에서 편하게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폭탄이 설치된 유람선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선장은 태풍 때문에 배 안이 난리인데도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어 있는 요나를 보고 이 사람은 태풍과 연관이 있다.’라고 직감했습니다. 선장은 서둘러 요나를 소리쳐 깨웠습니다. 선장의 고함에 잠을 깬 요나는 선장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게다가 뱃사람들은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이런 태풍이 왔는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제비뽑기한 결과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제 요나는 이런 사태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깊이 잠들었던 것도 하나님의 배려에 의한 것임을 어렴풋이 짐작했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일들은 요나 자기 생각이 옳았기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때문에 태풍이 왔다고 뱃사람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생고생한 것입니다. 자신은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경우가 일생생활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속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고속버스 승객 중에는 가족도 있고, 연인 사이인 남녀도 있고, 친목 단체 회원들도 있습니다. 노인도 있고, 어린이도 있고, 외국인도 있습니다. 고속버스 승객 중에는 즐거운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고, 책을 보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창밖을 보는 사람도 있고, 잠을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승객을 태운 고속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속버스 운전기사는 과로와 누적된 피로 때문에 매우 피곤한 상태이고 잠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는 졸음이 밀려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는 차가 별로 없어 한가합니다. 그러다 보니 운전기사의 주의력은 더욱 떨어져 그만 깜빡 졸고 맙니다. 졸음 때문에 운전기사는 핸들을 놓치고 맙니다. 핸들 조작이 안 된 고속버스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앞차와 충돌을 하고 맙니다. 운전기사와 승객 모두가 큰 상처를 입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에 있습니다. 고속버스 승객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고속버스 승객들은 단지 졸음운전을 한 운전기사와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운전기사의 졸음 운전으로
잘못 없는 승객들이 피해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나가 탄 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풍 때문에 배가 거의 부서질 정도가 된 원인은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잘못은 요나가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떨고 아까운 물건까지 바다에 버린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상황에 대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잘못은 딴 사람이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피해는 내가 입었다면,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학교생활을 할 때,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 두 번 정도 했을 것입니다. 개구쟁이 한 명이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 선생님에게 발각됩니다. 선생님은 개구쟁이뿐만 아니라 반 전체 학생들에게 벌을 줍니다. 개구쟁이 이외의 다른 학생들은 억울하게 벌을 받은 셈입니다.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실제 전쟁에 투입되어 싸우는 병사들은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병사들은 이유도 모른 채 많은 고생을 하고 죽기까지 합니다. 전쟁 중에는 일반인들도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고생하고 죽기도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의 잘못이 없는데도 고통을 당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서로 연결된 공동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태풍이 배에 불어 닥친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배에 몸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요나에게만 벌을 주시면 되지, 왜 배에 탄 다른 사람들까지 두려움에 떨게 하고 아까운 물건까지 바다에 버리게 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오늘날 개인 이기주의적인 인간관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나가 탄 배에 있는 사람들은 요나가 어떤 연유로 배에 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요나가 배에 타기 전까지 배 안에 있는 사람들과 요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요나가 배에 탄 순간, 요나와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한 공동체, 한 배에 탄 사람들이 됩니다. ‘한 배에 탄 사람들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잘못 또는 죄 때문에 함께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손가락에 가시가 찔렸을 때 온몸이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공동체는 일종의 유기체적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성은 실제적입니다. , 가족 중 누가 실직을 당하거나 질병을 앓고 있으면 온 가족이 고통을 겪습니다. 비행기가 고장을 일으켜 추락하면, 그 비행기에 탄 모든 사람이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사람들은 서로 얽혀 있는 공동체적인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드뭅니다. 드물기는커녕 아예 없습니다. 개개의 인간은 지구라는 한배에 탄 공동체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입니다.

개개의 인간은
‘지구라는 한배’에 탄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란 책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미치 앨봄(Mitch Albom)이라는 작가가 루게릭병으로 근육과 신경이 마비되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모리 선생과 매주 화요일에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입니다.

모리 선생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모리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존하는 걸 즐기기 시작했어. 이제는 사람들이 날 옆으로 눕히고, 짓무르지 말라고 크림을 엉덩이에 발라주는 게 즐겁단 말일세.” 모리 선생은 이전에 모든 것을 혼자 처리했었는데, 이제는 병상에 있으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이 책에서는 파도들이 생성되었다가 부서지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의인화해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파도가 점점 해안 절벽에 가까워지자 두려워합니다. 자신이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때 다른 파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냐 넌 잘 모르는구나. 우리는 그냥 파도가 아니야. 우리는 바다의 일부라고.’”

파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향, 즉 바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파도는 마치 꼬마들이 재잘거리면서 소풍을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바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소풍 또는 캠핑은 대개 흥분되고 재미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캠핑할 때, 대개는 마실 물과 씻을 물도 여유롭지 않고, 잠자리, 화장실 등도 불편합니다. 그런데 캠핑이 재미있고 즐거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으므로 캠핑이 즐겁고 신나는 것이란 답변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만일, 돌아갈 집이 없다면, 계속되는 캠핑은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되는 캠핑은 거의 지옥과 같은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열악해도 캠핑이 즐겁고 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진짜 집은 천국에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잠시 캠핑하러 온 곳입니다. 이런 생각(또는 믿음)을 가지면, 이 세상에서의 생활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재미있고 즐거워집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진짜 집(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실제 캠핑할 때, 여건이 어렵고 힘들수록 묘한 재미를 느끼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의 생활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신다면, 돌아갈 - 언제 돌아갈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 진짜 집(천국)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 아닐까요?

천국을 믿는 사람들, 예를 들어 순교자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캠프장에 수도시설, 주방시설, 난방시설, 화장실 등이 잘 갖춰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캠핑을 제대로 즐기려면, 시냇물을 이용하고, 장작불에 음식을 해 먹고, 좁고 불편한 텐트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위대한 전도자이자 순교자인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피해 카타콤(로마 시대의 지하묘지)에서 힘들고 어렵게 생활했던 이름 없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을 믿었던 이들은 이 세상을 캠프장과 같은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믿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수없이 순교를 당했고, 그 순교 장면이 매우 처참했습니다. 일반인들은 순교자들의 처참한 죽음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예를 들면, 초기 기독교 당시에 로마의 원형 경기장 안에서 순교자들이 맹수에게 뜯기고, 목이 잘리는 등의 상황을 묘사한 영화의 장면을 보면서 일반인들은 몸서리를 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이 과연 순교 당시의 고통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끔찍하게 느꼈을까요?

성경 내용을 통해 순교자들의 죽음 장면을 보겠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천국을 보았습니다. 천국을 본 스데반은 천국에 너무 가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산(일명 변화산이라고 함)에서 예수님이 용모가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고 있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상황이 마치 천국같이 느껴져서 예수님께 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복음 17 4,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을 본 사람은 누구나 빨리 천국에 가려고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당장 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스데반을 향해 돌이 날아왔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던진 돌이었습니다. 돌에 맞은 스데반은 순간적으로 매우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제 돌에 맞아 죽게 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돌에 맞는 고통은 기쁨으로 변했고,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변했습니다.

이런 이유, 즉 천국에 빨리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이유로, 스데반은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처럼 순교자들은 천국을 보았거나 믿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순교자들은 천국에 간다는 기쁨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요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잘못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 배에 탄 사람들이라는 공동체성에 근거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우리는 호흡을 통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고속버스를 타면, 승객들은 고속버스의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에 서로 호흡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내쉰 숨을 저 사람이 마시고, 저 사람이 내쉰 숨을 이 사람이 마시게 됩니다. 거시적으로 보면, 전 인류는 대기권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나누는 지구 버스에 탄 승객들입니다.

인류는 대기권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서로 호흡을 나누는 ‘지구 버스’에 탄 승객들입니다.


우리가 코 혹은 입을 통해 호흡하는 공기는 그냥 사라지는 않습니다. 내가 들이마신 공기는 내 몸속에 산소를 공급하고, 다시 대기 중으로 배출됩니다. 호흡을 통해 몸 밖으로 배출되는 공기는 운동에너지와 열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과 열기를 가진 것은 에너지가 있다.”라는 과학 지식은 웬만한 중학생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추운 겨울날 입김이 생기는 것을 보면, 코 혹은 입으로 뱉어낸 공기에 열에너지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호흡으로 들이쉬고 내뱉는 공기는 엄청난 양의 기체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과학 법칙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그것입니다. 에너지 보존법칙이란 에너지의 형태가 바뀌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에너지가 옮겨갈 때전체 에너지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법칙입니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따르면, 내가 호흡한 공기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내 코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에너지 보존법칙이 적용되는 전 세계에 영향을 줍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과학이론을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가 그것입니다. 나비 효과란,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tornado)를 발생시킬 수 있다.”라는 과학 이론입니다. 변화무쌍한 날씨의 예측이 힘든 이유를 설명한 이론으로,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변화가 날씨를 바꿀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일으킨 아주 작은 에너지 변화가 토네이도와 같은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면, 우리의 호흡과 움직임은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우리의 호흡과 움직임은 나비의 날갯짓보다 훨씬 크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호흡하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을까요?

음식을 통해서입니다.”

음식을 통해서 우리가 에너지를 공급받는다는 증거는,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음식은 우리 몸을 위한 일종의 배터리입니다. 음식은 소화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을 제공합니다.

물질이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과학상식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 중의 한 명인 리처드 파인만은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음식을 구성하던 원자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로 바뀝니다. 음식의 주원료인 쌀과 밀을 구성하는 원자는 물, , 공기, , 및 미생물 등을 구성하던 원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호흡으로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에 날라옵니다. 중국에서 날라 온 이산화탄소는 우리나라 논에 심어진 벼에 탄소동화작용으로 흡수되고, 최종적으로 쌀에 포함됩니다. 그 쌀을 제가 사서 밥을 해 먹으면, 그 밥은 저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저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로 변환됩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서양의 바닷물이 태양열에 의해 증발하여 구름이 됩니다. 이 구름은 바람을 타고 흐르다가 우리나라에서 비구름이 되어 비가 됩니다. 이 비는 논과 밭, 과수원 등에 내려 곡식과 채소, 과일, 가축이 먹는 풀 등에 흡수됩니다. 저는 그것들을 음식으로 섭취합니다. 음식으로 섭취된 그것들은 제게 에너지를 공급하거나 저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이 됩니다. 대서양의 바닷물이 이제 저의 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예전에 중국 사람의 일부였고, 대서양의 바닷물이었습니다. 이렇듯 제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모두 어딘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언젠가는 제 몸을 구성하는 물질도 다시 흙이 되기도 하고, 풀과 나무가 되기도 하고, 개나 고양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구름과 바다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미국 사람의 일부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듯 우주 만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섭씨 36.9도의 체온을 유지합니다. 물론 동물들도 살아있는 한 그들 고유의 체온을 유지합니다. 여러분이 옆에 있는 사람 몸에 손을 대면 따뜻함을 느낍니다. 에너지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람은 섭씨 36.9도의 열을 방출하는 일종의 난로(heater)입니다. 이 난로의 연료는 먹는 음식입니다. 이 난로, 즉 사람 몸에서 방출되는 열은, 앞서 말씀드린 호흡에서처럼, 에너지 보존법칙과 나비 효과에 따라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발산하는 열을 통해 전 세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집요하고, 장황하게, 그리고 억지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하게, 인류가 호흡과 물질 그리고 체온을 통해 전 세계에 연결되어 서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구라는 한배에 탄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면,
우리의 호흡과 체온은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까요?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자기 독자성을 주장합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마치 우주가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개인주의적 독자성에 따라 행동할 때, 대개는 편협한 마음을 갖고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과 왕이 뉘우치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철회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하시며, 특별한 방법으로 요나의 옹졸하고 편협한 마음을 나무라셨습니다. 그 내용은 성경 요나서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에 재앙을 내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니느웨를 빠져나왔습니다. 니느웨를 빠져나온 요나는 니느웨가 잘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앉았습니다. 이런 요나를 보고, 하나님은 박 넝쿨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그동안 요나의 괴로웠던 심정을 다소나마 위로해 주시고 몸을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시원한 박 넝쿨 그늘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이 시원한 그늘은 자신이 화를 내면서 짜증을 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셨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판단에 따라 요나는 이제 니느웨에 재앙이 내릴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은 벌레 한 마리로 박 넝쿨을 갉아 먹게 하여 시원한 그늘을 없애셨습니다. 해가 뜨자, 하나님은 뜨거운 동쪽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해가 요나의 머리 위를 뜨겁게 내리쬐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금방 힘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죽고 싶어졌습니다. 요나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요나가 불평하자, 하나님은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라고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요나는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례하게 대답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십이만 명이나 있고 가축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 4 10~11, 표준새번역 성경)”라고 물으셨습니다.

성경은 위의 마지막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질문에 독자가 대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요나가 처했던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요나가 그늘을 만들어 준 박 넝쿨을 그렇게 아꼈다면, 하나님이 어린아이 십이만 명을 포함해 수많은 생명이 사는 니느웨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요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종교와 국가와 이념과 인종을 초월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판단으로는 당연히 망해야 하는 사람과 나라에까지 미칩니다. 예수님도 산상설교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태복음 5 43-45, 개역한글 성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반기독교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미친다.”라는 옹졸한 생각과 편협한 마음 때문 아닐까요?

인간의 마음은 옹졸하고 편협합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무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서로 연결된 유기체적 공동체로 보십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저에게는 가족이 있습니다. , 아내와 자녀가 있습니다. 저는 집안의 가장이기 때문에 저의 마음에는 가족 모두가 담겨 있습니다. 이에 반해 자녀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마음에 자신들의 생각만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회사 대표가 있고, 그 회사에 채용된 직원들이 있습니다. 회사 대표는 회사와 직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만, 직원들은 회사 대표가 생각하는 만큼 회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국민이 있습니다. 국민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대통령이 잘하느니 못하느니 비판하고 불평해도 대통령만큼 나라와 국민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온 인류와 우주 만물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므로 사소한 것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요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사소한 데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기록합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요나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 누워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평범하게 잠들게 할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잠시나마 깊이 잠들게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느라 힘들고 지쳤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힘들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깊은 잠, 즉 단잠을 자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였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도망자는 대개 언제 잡힐지 모르기 때문에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시선이 배 밑창까지 닫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실이 마음에 부담되었습니다. 요나의 마음 상태는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요나가 깊이 잠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영화와 연극에 비유하면, 하나님은 감독 혹은 연출자이십니다.

잠시 후면,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견뎌야 합니다. 그런 후에 죄악이 가득한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버텨내야 하고 니느웨까지 가려면, 그 전에 심신의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심신의 휴식과 회복을 위해서는 단잠 혹은 숙면이 효과적이다.”라는 사실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단잠을 통해 심신이 회복되도록 요나의 마음에 평안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깊이 잠들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큰 교훈을 줍니다. 요나의 이야기에서 인류는 개별적 존재들이 모인 모래 같은 집단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체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유기체인 자신의 몸을 돌보듯이 하나님은 유기체적으로 연결된 전 인류를 돌보십니다.

손끝에 박힌 작은 가시 때문에 몸 전체가 통증을 느끼듯이, 하나님은 인류 전체의 한 부분인 니느웨가 죄악으로 물든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 마음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물에 미칩니다.

하나님 사랑의 손길은 죄악으로 가득 찬 니느웨와 같은 큰 성읍뿐만 아니라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친 한 사람 요나에게도 미칩니다. 요나가 비록 불순종하고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요나의 앞일을 생각해서 잠깐이나마 깊은 단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피로 회복제입니다.

잠은 하나님이 주시는 피로 회복제입니다.


언어 논리적으로, 잠은 사람이 청할 때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잠을 청한 사람에게 잠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잘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는 잠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공급받을 때만 혼탁해진 인류의 여러 가지 문제와 죄악들이 말끔히 씻겨집니다. 큰 성읍 니느웨의 죄악이 용서받은 것처럼


<일곱 번째 비밀: 요나의 잠, >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C. 숙면과 힐링을 위한 성경 33 구절

1. 첫 번째 비밀_예수님의 잠

3. 세 번째 비밀_베드로의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