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 번째 비밀_나사로의 죽음
네 번째 비밀:
나사로의 죽음
(초기 기독교인들은 과연 식인종(?)이었을까?)
어떤 사람이 죽은 사람을 보고 “자고 있다.”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십중팔구, 그 사람을 미친 사람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미친 사람도, 정신 나간 사람도 아니라면, 생각할
문제가 꽤 있습니다.
즉시 떠오르는 생각은 “사람은 잠든 사람을 깨울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을 깨울 수 없다.”입니다. 저는 잠자고 있는 저의 아이를 깨울 수 있지만, 어제 돌아가신(죽은) 이웃집 할아버지를 깨울 수 없습니다. 죽음은 신(神)만이 - 신은 전능하다는 가정하에 - 깨울 수 있는 아주 깊고 긴 잠입니다.
죽은 사람을 보고 “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는 신이거나 신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요? 제가 알기로, 그런 사람이 인류
역사상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잠과 죽음을 좀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잠과 죽음에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의식은 모두 정지하며, 대개는 눈을 감습니다. 외견상 잠자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겉모습은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잠과 죽음에는 차이점이 많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숨을 쉬지만, 죽은 사람은 숨쉬지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의 심장은 뛰지만, 죽은 사람의 심장은 뛰질 않습니다. 잠자는
사람의 손발은 따뜻하지만, 죽은 사람의 손발은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꿈은
잠자는 사람만 꿉니다. 대부분 사람은 잠을 좋아하지만, 죽음은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까요? 죽음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서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사전 지식 없이 외국에 갈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나라(외국)에 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고, 그 나라 언어에 능통하고
문화에 익숙하면, 그 나라에 가는 것은 흥분되고 설레는 일입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방법이 생깁니다. 죽음 이후의 상황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면, (그리고 만일 있다면, 사후 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능통하면),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기대와 설렘의 대상으로 변합니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면, 외국을 알 때보다 더 유익합니다. 외국에는
평생 가지 않을 수 있지만, 사후 세계에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잠은 하루의 피로를 풀어줍니다. 잠을 자고 나면 심신이 상쾌해지고 개운해짐을
누구나 경험합니다. 잠을 자는 이유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반해 죽음이 무엇인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알아보려고 스스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현재로선 정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저 같은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깊이가 얕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죽음과 관련한
주장들을 살펴보고, 이들 내용을 토대로 저의 생각을 나누려고 합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체적 죽음에서, 육체란 살아 있는 유기체이고, 영적 죽음에서, 영이란 영혼을 말합니다.
육체적 죽음은 동물적 생명이나 삶(생명)의
끝 혹은 상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몸과 영혼의 분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중지 또는 종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소멸이라고 하지만, 육체의 죽음이 소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으면 유기체였던 육체는 땅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거나 불에 태워져 다른 형태의 물질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소멸이 아니라면, 죽음은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죽음이 생명과의 단절이라면, 삶과 죽음은 존재와 비(非)존재로서 대립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양태(상태)로서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은 다른 존재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축구 선수는 경기장 내에서 활약하는 존재일 수 있고, 반칙 때문에 퇴장을 당해 더그아웃(dugout)에 머무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축구 선수가 경기장 내에서 활약할 때는 생명이 있는 선수입니다. 그렇지만, 경기 중에 반칙을 저질러 퇴장을 당하면 생명이 중단된, 경기장에서 죽은 선수입니다.
이런 예도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법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생활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람은 돈을 더 벌기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경찰은
이 사람의 범죄를 확인하고, 이 사람을 체포합니다. 경찰에
체포된 이 사람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감옥에 갇힙니다. 이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유인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후에는 범죄자 신분이 됩니다. 이제 이 사람은
자유인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회생활에서 죽임을 당한 신분이 됩니다.
이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죽임을 당한 이유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이런 식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독교는 주장합니다. 기독교 경전인 성경은
“죽음이 죄를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 최초의 죄를 “인간이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많은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과나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이브가 건네준 선악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서 생겼다고 알려진 아담스 애플(Adam’s Apple; 후두융기, 갑상연골, 울대뼈)의
영향 때문입니다.
선악과 자체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법으로 정해지지 않았으면,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창세기 2:16-17, 표준새번역 성경)”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일까요? 죄의 본질은 아담이 자신과 하나님을 대등한 위치에
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지 않은 것;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지배하도록 하지 않은 것;
선악을 아는 지식을 하나님의 손에서 탈취하여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집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은 먹어도 술과 담배는 먹지 말아라.”라고 말한 것을 자녀가 지키지 않고 술과 담배를 먹은 것과 유사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지시를 어기고 부모 행세를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한마디로
말하면,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즉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죽음은 죄 때문에 왔습니다. 자연 과학에 따르면, 죽음은 유기체인 인간 몸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인간 몸이 대략 십여 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몸으로 바뀐다는 사실과, 아주 많이 늙어서 자연스럽게 죽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자연 과학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사고 때문에 죽습니다. 자연 과학의 견해에 따르면, 죽음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죽어야 하는 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에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육체적 존재의 마지막이며, 필연적으로 몸의 해체를 포함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현재 삶의 마지막이며, 자연적인 몸의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들이 생깁니다. “육체의 죽음 후에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생명도 끝나게 하는가? 만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영혼이
계속 존속한다면,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은 인간 본래의 속성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영혼 불멸성을
믿지 않지만, 영혼 불멸성에 대한 믿음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가장 저급한 종교에서조차 영혼 불멸에 대한
믿음이 발견됩니다. 일반적으로 영혼 불멸성에 관한 믿음은 문명의 단계와 관계없이 모든 종족,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됩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은 자연적인 본능
혹은 인간의 본성 구조 자체에 내재합니다.
영혼 불멸성을 입증하려는 다양한 논증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혼 불멸성을 입증하려는
다양한 논증은 영혼 불멸성을 긍정하려는 인간의 자연적인 노력 때문에 꾸준히 시도되고 있습니다.
영혼 불멸성에 대한 한 논증으로 형이상학적 논증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논증은
인간 영혼의 단일성에 근거하여 영혼의 해체 불가능성을 추론합니다. 이 추론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죽으면 육체(물질)는 각 부분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영적 실체인 영혼은 육체처럼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분리되거나 해체될
수 없다. 자연수 2는 1과 1로 분리될 수 있지만, 1은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육체의 해체와 달리 영혼은 해체되지 않는다. 육체는 해체되어 사라져도
영혼은 완전히 남는다.” 이런 논증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플라톤도 이런 논증을 사용했습니다.
영혼 불멸성에 대한 다른 논증으로 목적론적 논증이 있습니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인간은 거의 무한한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이 능력은 이생에서 충분히 개발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는 실현되기에 너무 먼 이상들이 있고, 이생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희망과 욕망이 있으며, 실망으로 끝나고 마는 열망과 갈망들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미래적 생존이 준비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혼 불멸성에 대한 또 다른 논증으로 도덕적 논증이 있습니다. 도덕적 논증은
종교성이 강한 논증으로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인간의 양심은 정의를 실현하는 우주의 도덕적인 통치자의 존재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현세에는 실현되지 않는다. 현세에서 선악이 심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세의 상황을 보면, 악인이 종종 번성하고, 부유하며, 건강한 삶을 누리지만,
정의롭고 의로운 사람이 종종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가 최고의 지배자가 되고, 현세의 부당함이 시정되는 미래가 있어야만 한다.” 철학자 칸트가
이런 논증을 정립했습니다.
영혼 불멸성의 다양한 논증처럼 영혼이 불멸한다면, 죽음 이후에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동사 ‘죽다’의 높임말인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돌아가셨다’라면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셨다는 걸까요? 한마디로 저곳, 즉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저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일반적으로
죽은 다음에 가는 세상을 ‘저 세상’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저승’, ‘천국’, ‘지옥’이라고 합니다.
죽음 이후에 영혼이 몸(육체)에서
분리되면, 영혼은 두 장소(천국과 지옥) 중 한 곳으로 갑니다. 성경에 따르면, 악인들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던져져 영원토록 고통을 받습니다. 한
예로 지옥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16:19-31 (표준새번역 성경):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하였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하였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부자가 무엇 때문에 지옥에 갔고, 거지가 왜 천국에 갔는지 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생의 물질적인 복이 천국과
상관없음을 암시합니다. 물질적인 복이 천국과 상관없다면, 천국에
가느냐 못 가느냐는 물질보다는 마음과 영혼에 달려 있습니다.
부자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부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므로 자기 생활에
하나님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거지는 상황이 다릅니다. 거지는
늘 무엇인가에 의지해야 합니다.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소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변합니다. 성경은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는 악인의 부류에 속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선인(善人)의
부류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 지옥에 떨어지지만, 선인의 영혼은 천국에 갑니다. 세속적 표현을 빌리면, 천국은 일차적으로 물질적인 큰 즐거움이 있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현세에서 가장 소망했던 모든 것이 성취되는 장소입니다. 기독교적 시각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소이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한마디로 상상할 수 없는 광채와 위대함과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입니다. 천국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에 비하면, 신혼 생활의 즐거움 조차도 시시할 뿐입니다. 이런 천국은 실감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재미없는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이 더 낫다.”라는 막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도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제 이 장의 앞에서 말씀드렸던 죽은 사람을 잔다고 말한 존재를 소개할까 합니다. 그는
바로 예수라는 청년입니다. 예수가 죽은 사람을 잔다고 말한 다음, 죽은
사람을 깨워 살린 성경의 내용을 두 군데만 소개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 18-19절, 23절-26절 (표준새번역 성경):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지도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절하며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다.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이르러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무리를 내보낸 뒤에, 예수께서 들어가서,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요한복음
11장 1절-14절,17절, 39절-44절 (표준새번역 성경): 어떤 병자가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의 자매 마르다의 동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다. 마리아는
주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은 여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빠이다.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서 “주님,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와 그의 자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앓는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신 그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다. 그런 다음에,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려고 합니까?”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그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덧붙여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주님, 그가
잠들었으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가 잠이 들어 쉰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중간 생략)
예수께서 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 안에 있은 지가 벌써 나흘이나 되었다. (중간 생략)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앞에서 죽음이란 ‘몸과 영혼의 분리에 의한 육체적 생명의 중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중지된 생명을 복귀시키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분리된 몸과 영혼의 연결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소녀와 나사로는 죽은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죽은 소녀와
나사로는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잠깐 잠자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소녀와 나사로의 분리되었던 몸과 영혼을 연결하여 잠든 사람을 깨우듯이 죽은 소녀와 나사로를 깨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진 전등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온(ON)하듯이, 소녀와 나사로의 분리된 몸과 영혼을 ‘생명의 연결 스위치’로 연결한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종종 잠으로 표현하고 있어, 잘못된 교리에 이용되곤 합니다. 잘못된 교리 중 하나가 ‘영혼 수면 교리’ 또는 ‘영혼 수면설’입니다. 이 잘못된 교리는 “성경에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할 때, 이 잠이 육신의 잠은 아니므로 영혼의 잠일 수밖에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영혼 수면 교리에 따르면, 몸과 영혼이 무덤에 내려갈 때, 영혼은 잠든 상태로 사실상 비(非)존재의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영혼 수면 교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거절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 특히 예수님은 - 죽음을
영혼이 잠든다거나 육신이 잠든다고 언급하지 않고, 단지 죽어가는 사람 또는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성경이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경우, 이는
죽은 몸과 잠자는 몸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몸과 잠자는 몸이 유사한 한 예는, ‘주변 세계와의 단절’입니다. 죽은
몸과 잠자는 몸은 모두 주변 세계와 상호 교류를 하지 않으므로 주변 세계와 단절된 상태입니다.
“죽음은 몸과 영혼의 분리이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상태는 죽어가는 상태이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상태는 잠자는 상태이다.”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것, 즉 생명은 몸과 영혼이 연결된 상태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몸과 분리된 영혼을 다시 연결(on)하여 죽은 사람을 잠자고 있는 사람처럼 깨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과 영혼이 계속 연결된 상태에 있게 하려면, 즉 생명을 유지하려면, 살아있는 생명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먼저 이런 물음이 필요합니다. 몸과 영혼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음식(飮食)입니다.’
“음식이 몸과 영혼을 연결한다.”는 근거는, 음식을
먹으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어야만 또는 섭취해야만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음식이란 무엇입니까?
음식은 먹거나 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음식에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의 영양소와 물이 포함됩니다. 음식은 식물, 고기, 생선, 버섯과 같은 균류, 치즈
된장과 같은 발효 물질 등으로 만들어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음식 또는 음식 재료를 사냥과 채집으로 얻었으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사냥, 채집보다는 농경, 목축, 양식 등으로 음식 또는 음식 재료를 얻습니다. 대부분 문화에서는 음식을 원재료 상태로 먹기보다는 요리 또는 조리를 거쳐 먹습니다. 다양한 문화만큼 음식 조리법(요리법), 선호식품 따위도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습니다.
종교나 사회적 관념은 어떤 식품 또는 음식의 섭취를 제한하거나 권장합니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타 문화권에서 혐오하는 음식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개고기 먹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지만, 서양에서는
개고기 먹는 것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저는 미꾸라지로 만든 추어탕을 좋아하지만, 추어탕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먹고 마시는 집단이 있습니다. 이
집단은 2000년이 넘게 식인종처럼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이 집단은 지금도 여러분 주위 곳곳에 엄연히 존재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집단은 초기에 불과
12명으로 시작했습니다. 이 집단이 살을 먹고 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이 집단을 만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날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의미 있는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내일 죽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식사 도중에 이 사람은 떡을 떼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하고, 제자들이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잔에 담아 제자들에게 주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이 마시게 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설령 기독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사람이 예수이고 그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베드로를 포함한 12명의
제자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예수님은 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을까요? ‘스스로 음식이 되어 먹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상당히 심오하므로 이미 알려진 내용만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교회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성찬’이란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가 떡과 잔을 들어 축복할 때, 그 순간 성령 하나님의 힘으로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된다.”는 화체설(化體說)(또는 실체 변화설)을
믿고 성찬을 행합니다.
개신교의 루터 교회에서는 성찬 시 믿음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 속에 예수님께서
실재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공재설(共在設)을 믿고 성찬을 행합니다.
그 밖의 개신교 대부분 교회에서는 성찬 시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設)을
믿고 성찬을 행합니다. 영적 임재설에 따르면, 오직 믿음으로
성찬을 먹을 때,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셔서 영혼에 양식이 된다고 합니다.
성찬에 대한 이론이 다양한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서 성찬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찬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줄까요? 실로 엄청난 유익을 줍니다.
성찬 이론에 근거하면, 기독교는 예수님을 먹는 종교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실제적입니다. 현학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한 예수님은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같은 정복자들과도 차원을 달리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죽어
자신의 살과 피를 (영적인) 음식으로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일을 했고, 많은 말을 남겼고, 많은 땅을 정복했지만, 자신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게 하여 지금도 개개인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음식이 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쌀이 죽어야만 밥이 됩니다. 밀이 죽어야만 빵이 됩니다. 배추가 죽어야만 김치가 됩니다. “배추를 소금에 절여 죽인다.”라는 표현에서 배추가 죽어야만 김치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가축이
죽어야 고기가 됩니다. 포도가 으깨어져 죽어야만 포도주가 됩니다.
음식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은 것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죽은 것을 먹어야 피할 수 있다.”라는
사실은 일종의 아이러니(irony)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친히 음식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고는 음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사(自然死)한 가축의 고기는 고기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도살당한 가축의 고기라야 가치 있는 고기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이 도살당하듯이 죽임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음식이 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기에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깨끗한 분입니다. 반면에 모든 인간은 죄로 더럽혀진
타락한 존재입니다. 더러움은 깨끗한 것으로만 씻겨집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씻겨주기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라는 것이 기독교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유일하게 깨끗하신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죄를 씻긴다는 말입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약간의 배경 지식이 필요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약 98%가 1년 안에 새 원자로 교체됩니다. 내장 표면의 상피세포는 대략 5일,
피부는 대략 2주, 피 속의 적혈구는 대략 120일마다 모두 바뀝니다. 간은
1~2년 정도면 모두 교체되고, 뼈는 10년, 근육이나 내장도 15~16년이면 모두 교체됩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원자들을 끊임없이 교체시키는 공급원이 바로 음식입니다. 즉, 인간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몸을 이루는 세포의 원자를 교체합니다.
우리 몸은 좋은 음식을 먹으면 좋아지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 나빠집니다. 몸이 좋아지고 있으면, 그 이유 중 하나가 먹는 음식이 좋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몸이 나빠지고 있으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먹는 음식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는 좋지 않은 음식입니다. 그 이유는 햄버거를
많이 먹으면, 몸이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패스트푸드가 몸에
좋지 않은 다른 이유는 ‘음식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시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음식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입니다. 많은 시간 정성을 들인 음식치고 몸에 나쁜 음식 없습니다. 오랜
시간 숙성된 포도주와 발효식품이 좋은 예입니다. 많은 시간 정성을 들인 좋은 음식을 먹으면, 장수하는 이유가 그 음식에 담긴 시간을 몸에 저축하기 때문입니다.
채소 및 과일 같은 자연식품은 좋은 음식입니다. 그 이유는 이들 자연식품을 먹으면
몸이 좋아지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으로 자란 재료를 사용한 식품 또는 화학적인 농약이나 약품을 사용하지
않고 만든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몸에 좋습니다. 반면에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가공 처리된
가공식품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왜, 인위적으로 가공된 식품은 나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인간의 본성적인 ‘죄’ 때문입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입니다.
‘하말티아’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못하고 탈선한
행위로 봅니다. 죄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탈선한 행위로 볼 때, 죄는
더러운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무언가가 있을 자리에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방금 지은 밥이 거실의 카펫에 쏟아지면, 카펫이
아무리 깨끗해도 카펫과 밥 모두 더럽혀집니다. 아주 배고픈 상태가 아니면, 카펫에 쏟아진 밥을 먹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밥이 있을 곳은
밥그릇입니다. 침이 입안에 있을 때는 유익한 작용을 하지만, 입
밖으로 뱉어지면 그 자체가 더러울 뿐 아니라 주변까지 더럽힙니다. 유조선의 원유가 바다로 유출되면, 바다를 더럽힐 뿐만 아니라 원유 자체도 더럽혀집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과 떨어져 있으면 (인간의 마음이 있을 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것이 죄라는 것이 기독교
관점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는 거룩하지 않은 근원 - 인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 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죄는 강물처럼 모든 세대의 인류에게 흘러내려 가면서, 이
더러운 강물에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부패시키고 있습니다.
더러운 것은 씻어내야 합니다. 더러운 것은 제거 혹은 분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더러웠던 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그릇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옷에 얼룩이 묻어 있으면, 이 옷은 정상적인
복장으로 착용 못합니다. 거울이 더러우면, 사람의 모습을
완전하게 비춰주지 못합니다.
그릇과 옷과 거울이 더러우면, 물로 씻거나 닦아 내야 합니다. 더러운 것을 씻거나 닦아내는 물은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더러운
물로 더러운 그릇을 씻으면, 그릇은 이전보다 더 더러워집니다. 더러운
헝겊으로 거울을 닦으면, 거울은 더 더러워집니다. 더러운
것은 깨끗한 것에 의해 씻겨지거나 제거되어야 합니다.
물건이 더러우면, 깨끗한 것으로 씻으면 되지만,
인간의 영혼이 더러우면, 무엇으로 씻어야 할까요?
인간은 현재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 모두 인간은 완전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계속 진화한다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완전한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영화에 나오는 흉측한 외계인처럼 생긴 존재일까요?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완전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이 완전한 상태가 되려면 몇만 년 혹은 몇억
년이 걸려야 할지 모릅니다. 진화론자들은 현재의 인간을 원숭이와 비슷한 유인원에서 수백만 년 혹은 수천만
년 동안 진화된 상태라고 주장합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매우 긴 시간이 흘러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 과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진화론자들과 과학자들은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어마어마하게 긴 수백억 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는 화석과 지층의 연대 그리고 우주의 팽창 속도 등을 측정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진화론과
빅뱅이론이, 현재 과학계에서 주류로 인정되지만,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화석과 지층의 연대 그리고 우주의 팽창 속도 등이, 현재 상태에서, 그렇게 측정되도록 우주 만물을 창조한 것은 아닐까요? 전지전능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창조론자들은 인간이 죄로 몸과 마음을 더럽혔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창조론의 관점에서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주가 정해 놓은 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장시간
제대로 사용하려면, 컴퓨터 제조사가 만든 사용법을 지켜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주가 정한 법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주가 정해놓은 법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이 죄로 인해 인간의 완전한 상태는
부패하였고 더럽혀졌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인간에게는 좋은 것, 선한 것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는 순간 인간의 좋은 것, 선한 것들은 부패하고 더럽혀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원론(二元論, Dualism)의 오류를 지적한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의 말이 옳습니다.
이원론은 “모든 것의 배후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힘이 있으며, 우주는 이 두 힘이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 C.S. 루이스는 “악은
좋은 것(또는 선한 것)이 부패한 것이고, 악은 원형(原型)이 아니라
원형에 기생하는 것이며, 악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결단력, 영리함, 배짱, 멋진
외모 등)은 선(善)에서
온다.”라고 주장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부패하고, 더럽혀졌고, 악해졌다는
것이 창조론의 관점입니다. 창조론의 관점을 수용할 경우, 죄만
씻어내면 개인의 문제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먼저 죄가 없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더러운
그릇을 씻기 위해서 깨끗한 물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씻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좋은
소식, 복음(Good news)’이라고 하며, 믿음으로 효력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실제이고 사실이라면, 저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싶을 것입니다.
복음이 실제이고 사실이라면, 복음을 누구나 믿어야겠지만, 문제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복음’의 역사적 ‘사실’이 현실감으로
다가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을 현실감으로 느끼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죄를 씻는지 알아보고, 그것이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 알아볼 차례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생활에서 겉으로 드러난 죽음의
원인은 다양합니다. 질병, 노화, 사고 등등이 그것들입니다. 질병,
사고, 노화는 죽음의 표면적인 원인에 불과합니다. 죽음의
진짜 근본 원인은 ‘죄’입니다.
죽음의 진짜 원인이 ‘죄’라면, 죄를 씻음으로써 죽음은 사라질 수 있고, 적어도 죽음을 멀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죄를 씻어내면, 현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한
암과 같은 질병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죄를 씻어내면, 암을
제거할 수 있다고 단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가 실질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죄를 씻어내면, 우리는 죄를 짓기 이전처럼 완전해질 것입니다. 완전함에는 논리상 질병이 포함될 수 없습니다. 완전함에는 죽음이
배제됩니다. 죄를 씻어 완전해지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죄가 없는 깨끗한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더러운 그릇을 씻기 위해서는 깨끗한 물이 필요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을 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시고 완전하게 깨끗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식적, 이론적이 아닌 현실적, 실제적으로 씻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의식인 소위 ‘성찬’을 행하는 모습 때문에 고대 로마 사람들은 한때 기독교인들을 식인종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런 오해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았고 실제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쉽게 확인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성찬’ 의식
때문에 식인종이라는 오해도 받고, 박해와 순교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굳이 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했을까요?
식인종이라는 오해와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 위험성보다 더 큰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죄를 현실에서 실제로 씻어 내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닐까요?
죄가 없으시므로 유일하게 깨끗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때만, 우리 몸에
스며있는 더러운 죄가 씻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생전에 떡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라고 상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상징하신
떡과 포도주를 볼 때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체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기 위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음식이 되기 위해 죽으신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보다 믿음으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믿음의 작용 때문에 죄가 씻겨짐을
체험한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사람들을 책에서 또는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죄를 계속해서 씻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 깊이 스며 있는 더러운 죄를 씻기 위해 - 교리상으로 허용된다면
-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음식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믿음을 가지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옷에
묻은 더러운 때(오물, 더러움)를 깨끗한 물로 여러 번 씻어 없애듯이 우리 몸에 스며 있는 죄의 더러운 때도 여러 번 씻어 없애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여러 번 반복적으로 먹으면, 죄의 더러운 때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도 지지합니다. 과학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1년
정도면 대부분 교체된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몸을 구성하는 재료의 주 공급원인 음식의 섭취는 매우 중요합니다.
음식을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믿음을 가지고 먹으면, 우리의 살과 피도 예수님의
살과 피로 점차 교체되고, 결국에 우리 몸도 예수님의 몸처럼 순결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영혼 또한 예수님의 죄가 없는 깨끗한 영혼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영혼 또한 깨끗해질 수 있다는 근거는 음식을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믿는 근원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생성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밭인 영혼이 먼저 깨끗해져야 합니다.
영혼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몸이 깨끗한 존재가 필요했듯이 - 영혼이 깨끗한 존재가 필요합니다. 영혼에 죄가 없는 존재만이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영혼을 깨끗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혼만이 순결한 영혼입니다.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몸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써 깨끗해지듯이,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영혼도 예수님의 영혼을 먹어야만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혼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요?
음식을 먹으면, 소화기관에서 소화되어 몸에 흡수됩니다. 영혼의 음식은 생각으로 먹습니다. 영혼의 음식을 생각으로 먹으면, 마음에서 소화되어, 영혼에 흡수됩니다.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생각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나를 위해 - 나의 영혼의 음식이 되기 위해 - 죽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영혼의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 가축이 도살당하듯이 - 우리를 위해 죽은 존재여야 합니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을까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영혼의 음식이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분입니다(이
때문에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거룩한 제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영혼에 스며있는
죄를 씻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생각으로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먹는 구체적인 방법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고백하고 마음속에 새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사실 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생각으로 예수님을 먹는 방법입니다.
생각으로 예수님을 먹으면, 마음은 예수님으로 채워집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채워지면, 마음의 소화작용 때문에 우리 영혼은 예수님의
영혼으로 교체되어 깨끗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으로 먹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변화되면, 우리는 땅의 능력이 아닌 하늘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하늘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천재(天才) 이상의 천능자(天能者)입니다.
우리의 영혼육이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죄가 없는 깨끗한 상태로 변화될 때,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이 충만하면,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였던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이런 상태는 죽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에게 지금 이 세상과 죽음 이후의 저 세상은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먹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고,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완전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실제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으로 먹음으로써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개인과 인류의 모든 곤경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네 번째 비밀: 나사로의 죽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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