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 번째 비밀_베드로의 잠

세 번째 비밀:
베드로의 잠
(베드로는 어떻게 사형 전날 밤 감옥에서 편히 잘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어떻게 사형 전날 밤
감옥에서 편히 잘 수 있었을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수제자(首弟子)였습니다. 베드로는 초기 기독교의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이었고, 로마 황제 네로의 치하에서 순교했습니다. 이 정도는 기독교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아는 내용입니다.

유명한 고전 영화 쿼바디스를 본 분들도 베드로를 어느 정도 알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베드로가 사형수 신분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서 평안하게 잠을 잤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 가능성 유무는 차차 논하기로 하고, 먼저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보겠습니다.

아래 성경 내용 중에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예를 들면; 무교절, 유월절, 천사 등)이 꽤 있지만, 일반인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도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천사, 쇠사슬이 스스로 풀린 것, 감옥 문이 저절로 열린 것 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2:1-11 (표준새번역 성경): 이 무렵에 헤롯 왕이 손을 뻗쳐서,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하였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그는 유대 사람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베드로까지 잡으려고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그는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4인조 경비병 4패에게 맡겨서 지키게 하였다. 유월절이 지나면, 백성 앞에 그를 끌어낼 속셈이었다.
이렇게 되어서,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헤롯이 베드로를 백성 앞에 끌어내기로 한 그 전날 밤이었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묶여, 두 군인 틈에서 잠들어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꾼들이 옥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의 천사가 나타나고, 감방에 빛이 환히 비치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 깨우며 말하기를 빨리 일어서라하였다. 그러자 쇠사슬이 그의 두 손목에서 풀렸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어라하고 말하니, 베드로가 그대로 하였다. 또 천사가 그에게 겉옷을 두르고, 나를 따라오너라하니,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서, 천사를 따라갔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일이 참인 줄 모르고, 자기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서, 시내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서, 거리를 하나 지났다. 그 때에 갑자기 천사가 떠나갔다. 그 때에야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말하였다. “참으로 이제야 알겠다. 주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셔서, 헤롯의 손에서, 그리고 유대 백성이 꾸민 모든 음모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감옥에 투옥된 베드로를 여러 명의 경비병이 감시하였습니다. 무려 16명의 경비병이 베드로를 감시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때는 무교절(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유대인의 절기) 기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 흘러 이제 베드로의 사형 전날이 되었습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었습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베드로는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시간은 쉬지 않고 묵묵히 흘러갑니다. 보통 사람이면 그런 상황에서 그만 넋을 놓은 채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날 밤 상황을 좀 더 보겠습니다

해가 뜨면 베드로는 목이 떨어져 죽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마음을 평안하게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겉옷을 벗고 허리띠와 신발마저 벗어 놓고 마치 감방이 자기 집 안방인 양 평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죽음을 앞둔 최악의 상황에서 잠을 평안하게 잔 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그 날밤 자신이 천사에 의해 구출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베드로를 구해 낼 때 베드로가 그 상황을 현실이 아니라 환상으로 착각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다음 날 죽게 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구출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것을 환상으로 착각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다음 날 죽는다는 두려움과 공포로 몸서리치다가 잠깐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내용에 따르면, 베드로는 천사가 옆구리를 찔러서 겨우 깨웠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사형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미쳐 버려서 그렇게 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내용과 베드로의 이후 행적을 보면 그런 오해의 여지는 없습니다.

다시 성경 내용을 통해 베드로가 감옥에서 잠자는 모습을 보면, 베드로는 감옥이 자기 집 안방인 양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태평하게 잠을 잔 것이 분명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베드로는 잠을 얼마나 깊이 잤던지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서 겨우 깨웠습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서 깨웠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비몽사몽 상태였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깬 상태를 환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태는 감옥 초소를 지나 시내로 통하는 감옥 정문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감옥 정문을 통해 시내 거리에 나와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고, 이 모든 것이 실제 상황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전철을 타고 가던 엄마가 아이를 깨우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아이는 엄마 무릎을 베개 삼아 잠자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오자, 엄마는 짐이 많으므로 아이를 업고 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흔들어 깨웁니다. 엄마가 흔들어 깨우자, 아이는 일어나지만, 눈은 여전히 감겨 있습니다. 아이는 비몽사몽 상태입니다. 전철이 목적지 역에 도착하자, 엄마는 서둘러 아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웁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한 손으로 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아이 손을 잡고 열린 문을 통해 전철 밖으로 나갑니다. 아이는 그제야 눈을 뜨고 꿈나라에서 현실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닫고 엄마 뒤를 따라갑니다.

좀 과장되지만,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엄마와 아이는 오늘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검사결과 아이에게서 불치병이 발견되었습니다. 의사는 아이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다는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죽음과 삶에 관해 설명할 방법을 찾다가 죽음은 오래도록 잠을 자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래도록 자고 난 다음에 깨어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곳, 천국에 있을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아이는 오래도록 자고 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천국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엄마 말을 듣고 좋아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천국에는 더 좋은 것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아이에게 죽는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아이는 머리를 엄마의 무릎에 댄 채 깊이 잘 수 있었습니다.

죽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천국은 좋은 곳인가?


죽음을 앞둔 아이가 엄마 무릎에서 평안히 잠을 잤던 것과 베드로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평안하게 잠을 잤던 것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습니다. 둘 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후에는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망은, 현실적인 비유를 들면, 유명한 맛집 식당에 들어가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의 소망과 같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 더 빨리 식당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입니다.

많은 사람은 천국 이야기에 거부감을 가집니다. 천국 이야기를 하면 듣기 꺼리거나 아예 귀를 막아버리거나 심한 경우 화를 내거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누군가 천국 이야기를 하면 허황한 이야기 한다고 면박을 주면서, 듣기 싫어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듣기 꺼리거나 듣기 싫은 말들이 자신을 성숙시키고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청소년 시절 부모님의 끊임없는 잔소리,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듣는 꾸지람, 회사에서 상사에게 듣는 모욕에 가까운 핀잔 등은 당장은 듣기 싫고, 심하면 분노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 그렇지 않은 예도 있지만 - 자신을 자극하여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되돌아보면 저는 그랬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즘의 문제는 듣기 싫어하거나 꺼리는 이야기, 잔소리, 꾸지람, 핀잔 등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일부러 또는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 후에 대부분 나는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듣는 상대방이 더 좋아질 수 있는데, 또는 더 잘할 수 있는데, 현재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닐까요?

다시 위의 성경 내용으로 돌아가면,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를 죽인 이유가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증오했기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인 사도들을 증오했을까요? 사도들이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나사렛 예수가 살아났고, 그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였다고 증언하면서 돌아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인 사도들을 증오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예수가 살아났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도들이 자신들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참수형(목을 자르는 사형) 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만일, 사도 야고보가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참수형을 당할망정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언을 멈추지 않았고, 이 때문에 결국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증언했던 이유는 그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감옥에 투옥되어 참수형을 기다리는 이유도 사도 야고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사도 야고보처럼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을 봤습니다.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습니다. 베드로는 수석제자로서 3년간 예수님과 합숙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천국에 관한 이야기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사흘 뒤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성령의 능력)을 받아 자신도 여러 기적(예를 들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역시 사도 야고보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저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다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평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하셨고, 지금도 약속하신 대로 하고 계십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항상 베드로와 함께하셨고, 현재 우리와도 -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뿐 -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항상 베드로와 함께하셨고, 우리와 함께 계신지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먼저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먼저 믿으세요. 그러면 이해하게 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또 많이 듣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비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이같이 말하는 일반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 먼저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할 만한 논증 없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처럼 무조건 믿어야 한다.”라고 윽박지르면서 몰아세우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청국장 냄새가 싫어서 청국장을 먹지 않다가, 청국장을 좋아하는 친구의 권유로 억지로 먹어봤습니다. 그런데, 먹어보니, 냄새 때문에 맛도 이상할 것이라는 저의 편견과 달리 뜻밖에 청국장이 맛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청국장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전에 저와 같은 생각 때문에 청국장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청국장을 일단 먹어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싫어하는 음식도 그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권유에 따라 도전정신을 가지고 억지로라도 먹어보면, 좋아하게 될 수 있고, 일단 위장으로 넘기면 결국 소화되어 건강에 유익합니다.

싫어하는 음식을 좋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억지로라도 계속 먹어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먹는 것(받아들이는 것), 즉 믿는 것도 비슷합니다. , 지적으로 또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애써 호감을 느끼면, 문뜩 자연스럽게 이해되어 삶에 유익합니다. 이럴 때, “이해되면 믿겠다.”라는 말보다는 믿으면 이해된다.”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생명까지 부활하신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예수님께 자기 생명을 맡기면, 예수님이 참수형을 당한 자신을 천국에서 영원토록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간단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간단했던 이유는 그가 배운 것 없는 무식한 갈릴리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더는 잃어버릴 것 없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어쩔 수 없이 믿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천국의 삶에 대해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느낄 수 있는 황홀한 경험을 어느 산(‘변화산이라고도 함)에서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현재의 삶도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천국의 삶도 중요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천국에 빨리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베드로에게 죽음이란 단지 다른 세상, 즉 천국으로 가기 위한 관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처형되기 전날 밤에도 감옥 속에서 그렇게 태평스럽게 잘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순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순교하면 저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은 끔찍한 처형 장면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순교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성경 기록에 따르면, 순교자들의 순교 당시 모습은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평온했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순교자들은 생전에 천국을 느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잠시 느껴본 천국은, 예를 들어 베드로의 경우 천국을 느꼈던 그 장소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마태복음 17:4)”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임이 분명합니다.

왜 사람들은 좋은 곳에 가면, “, 천국 같다. 이런 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성을 지를까요? 그만큼 천국이 좋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빨리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런 몸을 죽여 줍니다. 이제 누군가 몸을 죽여주면, 천국에 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순교자들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몸이 죽는 고통보다는 천국에 가는 기쁨이 더 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많은 사람이 그럴듯한 말로 자신들을 설득시키려 한다고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들을 법한 내용이므로 자신들의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감이 없으므로 실제 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베드로가 가진 천국에 대한 믿음,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는 기쁨과 이 기쁨에 근거한 평안함, 평안함에 의한 감옥에서의 태평스러운 잠 등은 기독교인들에게나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이지 일반인들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저 자신도 솔직히 베드로의 이야기는 성숙한 신앙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에게나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베드로의 잠이야기는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잠 이야기의 핵심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생명의 주관자가 되어 주셨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점(특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지금부터는 현실 생활에서 실제로 도움이 될 만한 잠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잠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도대체 은 무엇입니까? ‘은 왜 자야 합니까? 아직 잠을 자는 이유는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잠은 아직도 미지의 영역입니다. 잠을 자는 이유에 대한 이론이 다양하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대체 ‘잠’은 무엇입니까? ‘잠’은 왜 자야 합니까?



1) 어떤 과학자는 낮 동안 일을 한 뇌가 쉬어야 하고, 뇌에 쌓인 노폐물을 청소해야 하므로 잠을 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어떤 과학자는 노화해 죽은 세포를 낮 동안에 어느 정도 몸이 알아서 교체하지만, 그중에 교체하지 못한 세포를 몸이 쉬는 동안 교체해야 하므로 잠을 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3) 어떤 과학자는 낮 동안 힘들게 일했던 근육이 쉬어야 하므로 잠을 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경우는 잠을 잘 때 뇌가 깨어나는 일도 있으므로 100% 논리에 맞는 주장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몸의 세포가 아무리 많이 죽어도 잠을 8시간 이상 자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자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있습니다. 세 번째 경우는 환자들의 경우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보통 사람들과 비슷하게 자는 것을 보면, 이 또한 논리가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결국, 잠을 자는 이유는 아직 과학자들도 완전하게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과학자들이 잠을 자는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잠은 과학이 쉽게 다룰 수 없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 그리고 영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점을 약간 달리하면, 일상생활에서 잠을 자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 잠을 자는 이유를 일상생활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자동차 한 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자동차는 내가 산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동차의 주인은 나입니다. 나는 이 자동차의 주인이기 때문에 애지중지 잘 사용합니다. 차량 내부를 멋지게 장식도 합니다. 더러워지면 세차를 합니다. 부품의 교체 시기가 되면 부품 교체를 합니다. 정기적으로 차량 점검도 받습니다. 고장이 나면, 수리합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이 자동차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동차를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렌터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렌터카는 여러 사람이 빌려서 사용하게 됩니다. 렌터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렌터카를 정성스럽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렌터카 사용자들은 렌터카의 부품 교체 시기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고장이 나도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모든 이유는 렌터카가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자신이 렌터카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렌터카 사용자는 양심에 따라 렌터카를 어느 정도까지는 자기 차처럼 깨끗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렌터카 사장(주인)만큼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렌터카 사장은 자신이 렌터카의 소유주, 즉 주인이기 때문에 렌터카가 더럽혀졌으면 자신이 직접 청소를 하든지 아니면 직원을 시켜 청소합니다. 이용객들이 렌터카를 함부로 사용해서 손상되고 망가진 부분이 있으면, 수리합니다. 렌터카 사장이 이렇게 렌터카를 관리하는 이유는 렌터카의 주인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의 예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주인이 직접 사용하는 물건은 깨끗이 관리되고 유지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예를 들어 공공시설의 물건은 금방 망가지고 손상됩니다. 자기 집 화장실보다 공중 화장실이 몇 배는 더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자기 물건이 아니면 사람들은 대개 그 물건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공공 시설물이 대개 금방 망가지고, 공중 화장실이 금방 더러워집니다.

여기에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잠을 자고 나면, 대부분 몸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마치 더럽고 지저분한 방이 깨끗이 청소된 기분을 갖게 됩니다. 방은 스스로 청소할 능력이 없습니다. 더러웠던 방이 깨끗해졌다면, 이는 분명 누군가 방을 청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에서 일어난 후 몸이 개운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면, 혹시 잠자는 중에 어떤 존재가 인간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깨끗이 청소했기 때문 아닐까요?

그리고, 잠자기 전에 피곤한 상태는 혹시 사람이 자신을 남의 물건처럼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 아닐까요? 이 두 가지 질문은 좀 황당해 보여도 심사숙고할 가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출근하여 일을 열심히 합니다. 퇴근 후에는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하고, 자기 계발을 위한 공부도 합니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피곤하지만, 가족과 대화도 나눕니다. 그런 후 잠시 TV를 시청하다가 잠을 청합니다.

이 사람은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물론,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충고도 듣고 여기저기에서 좋은 정보도 수집하여 참고는 하지만, 최종 결정은 자신이 합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내면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과연 자신이 자기의 주인 맞습니까?

이 사람은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은 조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겠지요? 세상 이치상 준 사람이 본래 주인이며, 받은 사람은 수탁자에 불과합니다. 이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 사람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잠에 숨겨진 비밀과 신비를 밝혀내고, 잠에 숨겨진 보화를 캐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심을 가지고 잠의 신비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단 사람을 창조한 창조주가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좀 불편할 수 있겠지만, 편의상 성경의 기록에 따라 사람을 창조한 조물주를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동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 없이 살려는 가능성까지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배신(背信) 가능성을 감수하는 일종의 모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하나님은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마치 예술가가 자기가 만든 작품을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작가가 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십니다. 마치 엄마가 아기를 돌보듯이 말입니다. 아기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입에 갖다 댑니다. 엄마는 아기가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기겁해서 위험한 물건을 뺐습니다. 아기는 그런 엄마가 야속해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엄마가 아기의 울음에 마음이 약해져 아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아기는 십중팔구는 다치거나 위험한 상황에 부닥칩니다.

아기는 엄마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보실 때, 아기에 불과합니다. 아니 그 이하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이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볼 때,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피조물 또는 생명을 부여받은 수탁자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실제 자신의 주인이 아니므로 자신을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자기 딴에는 온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마치, 렌터카 이용자가 렌터카를 제멋대로 사용하듯이, 대중이 공공 시설물을 아무렇게 사용하듯이, 사람은 자신을 부지불식간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자신을 잘 사용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공 물건이나, 여러 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렌터카는 주인이 직접 사용하는 물건보다 더 쉽게 손상되고 망가집니다. 사람도 본래 자신의 주인이 아니므로 - 물론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 부지불식 간에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을 훼손하고 망가뜨리는 생활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성경에 따르면 아들 예수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아들 예수를 죽게 한 이유를 사람이 범한 죄 때문이라고 규정합니다. 그 죄란 것이 바로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 행세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려는 시도가 바로 죄입니다. 물론 사람이 지은 죄는 다양하게 표현됩니다. 예를 들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것,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는 상관없이 사람이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 사람이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하나님 대신 자신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 자신이 창조된 세계의 중심이며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이와 같은 반역에 가까운 사람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요한일서 4 7)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사람에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손자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납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때론 회초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하여 아무렇게나 행동하실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을 부지불식간에 잘못 사용하여 망가뜨리고 더럽힌 곳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의식이 시퍼렇게 활동하는 중에는 의식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회복시킬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잘못 사용하여
망가뜨리고 더럽힌 곳을 회복시키길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사람이 자기를 함부로 잘못 사용해도 손상되거나 피로해지지 않도록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완벽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 성경에 따르면 하와(Eve)를 만들기 위해 - 아담이 잠들었지 일상생활의 피곤함 때문에 잠을 잘 정도로 아담이 불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은 후, 즉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인 양 행세하기 시작한 후부터 사람은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청소년이 이제부터 내 힘으로 살 거야. 그러니까 간섭하지 마!”라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떠나면, 그 후부터 그 청소년은 온갖 고생을 하고 심신이 피곤한 삶을 살게 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집 나간 청소년은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도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풍족은 하겠지만 돼지처럼 우리에서 사육당하듯이 사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에게 과연 어떤 부모가 자식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돼지처럼 키우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일, 자식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돼지처럼 키우는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는 진정한 부모가 아닙니다.

사람의 현재 처지도 집 나간 청소년과 비슷합니다. 사람은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자유의지를 통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모든 것이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곤경에 있습니다. 이러한 곤경은 사람이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사람은 온갖 수고로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통해 주인 행세를 한 결과,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함부로 잘못 사용하여 손상되고 피로해지는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이 집을 나가 객지에서 고생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시듯이, 하나님 또한 사람이 스스로 주인 행세함으로 말미암아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의식이 작동하는 한 고생과 수고에 수반된 피곤함을 회복시키실 수 없습니다.

마취가 안 된 환자, 즉 의식이 있는 환자를 의사가 수술하지 않듯이, 기계공이 기계가 작동하는 중에는 수리하지 않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의식이 활동하고 있을 때는 치유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사람의 의식이 활동하는 한, 하나님은 치유할 수 없으십니다.

TV에서 상처가 난 야생 동물들을 고쳐주는 동물 애호가들의 활동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처가 난 동물들은 동물 애호가들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고 때론 무섭게 반항했습니다. 상처 난 동물은 동물 애호가들이 자기를 해칠 것으로 생각하는 듯 행동했습니다. 상처 난 동물이 움직이는 한 동물 애호가들은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취약을 쏘아 동물을 마취시킨 후에 상처를 치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처 난 동물과 동물 애호가의 관계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사람의 의식이 있는 한 사람은 마치 상처 난 야생동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의식이 활동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입니다. 잠은 일종의 하나님의 마취제입니다. 잠은 사람의 의식을 멈추게 하는 스위치입니다.

잠은 일종의 ‘하나님의 마취제’입니다.


잠든 상태에서 사람의 의식은 활동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잠든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망가뜨리고 더럽힌 부분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잠을 잔 후에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해지고 정신이 맑아집니다. 사람이 잠자는 동안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피곤해진 사람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사람은 에덴에서처럼 필요한 경우에만 잠을 선택적으로 잘 수 있거나 적어도 잠을 아주 적게 자고도 원기 왕성하게 생활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방법은 이것입니다.

잠은 사람이 망가뜨리고 더럽힌 부분을 하나님이 고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마취제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피곤해지는 이유는,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낮 동안의 활동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다면, 즉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매 순간 의식하면서 모든 활동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사람의 활동은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므로 잘못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관으로 사람의 일상생활이 바르게 행해진다면 손상되거나 피로해지지 않습니다. 두뇌를 비롯한 몸이 손상되거나 피로하지 않으면, 굳이 하나님의 마취제인 잠이 필요 없거나 지금보다는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지금까지 잘못된 길 -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온 길 - 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뉘우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임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기독교에서는 이를 회개라고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수천 년간 익혀 온 자기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리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쉽지 않습니다.

잠과 관련하여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사람이 잠자리에 들어도 염려, 걱정하면, 잠이 쉽게 오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가 주인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 걱정은 자신의 알량한 능력으로 무언가를 해 보려고 시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평안하게 잠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주인 됨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없는 상태, 즉 의식이 없는 상태, 이것이 바로 잠자는 상태입니다.

최고의 행복상태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졌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는 곧 내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내가 없는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아지경 상태는 그 자체로서 행복한 상태일 뿐입니다. 무아지경 상태는 단지 행복한 상태 그 자체일 뿐이지 사람의 손상되거나 피로해진 곳을 회복시켜 주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빈 그릇과도 같은 무아지경 상태는 오래가지도 않습니다. 빈 그릇은 시간이 흐르면서 반드시 무언가로 -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아지경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가야만 합니다.

나를 비워 내가 없는 상태로 한 후에 반드시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표현상 나를 비우기와 하나님으로 채우기 사이에 선후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마치 유리컵에 물을 따르면, 유리컵에 있던 공기가 물에 의해 밀려 나가면서 동시에 물이 채워지듯이 말입니다.

내가 비워지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진정한 행복이 오래도록 유지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잠을 통해서 의사가 고치기 어려운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수면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잠을 깊이 잘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내용에 동의하는 환자분이나 불면증이 있으신 분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 나를 비우고 하나님을 내 안에 초청하여 나의 병든 곳을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희망과 기도가 적극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인격이 있으신 분이시므로 뜻이 통하고 마음이 맞는 상대방과의 교제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잠을 사람의 손상된 곳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마취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람이 잠든 상태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원래 만들어진 형상대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부지불식 간에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더럽혀진 곳을 치유하고 청소해 주십니다.

사람이 잠자는 동안 하나님이 치유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은 일종의 신비이므로 우리가 인지할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잠을 자고 난 뒤에 몸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때론 중병도 치유된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짐작은 더러운 집안이 말끔히 청소되었다면 그것은 청소한 존재가 있다는 논리에 근거합니다. 더러운 집이 스스로 청소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누군가가 청소하지 않았다면,
더러운 집안이 말끔히 청소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청소한 것입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방문하셔서 사람을 돌보는 시간입니다. 잠자는 사람의 얼굴은 평화롭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이 방문할 때 사람은 평화롭게 됩니다.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가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런데 엄마와 떨어져 있는 아이는 얼마나 불안해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 평안을 얻고 휴식을 얻고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잠들게 한 후에 친히 방문하셔서 사람의 손상되고 더럽혀진 곳을 치유하시고 청소해 주시고, 온갖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십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방문하셔서
사람을 돌보는 시간입니다.


이제 잠이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스스로 주인 됨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낮 동안에도 매 순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여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식이 있는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심을 매 순간 고백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의식을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가 최상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천국의 삶입니다.


<세 번째 비밀: 베드로의 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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