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두 번째 비밀_다윗과 솔로몬의 잠
두 번째 비밀:
다윗과 솔로몬의 잠
(왕들의 잠은 어땠을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이아몬드일까요?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은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인도에 있는 사람에게
다이아몬드가 귀할까요? 무인도에 있는 사람에게는 다이아몬드보다 물과 식량이 더 귀합니다. 무인도에서는 다이아몬드 없이 살 수 있지만, 물과 식량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과
연관된 것들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것들은 무엇입니까? 물, 공기, 햇빛, 잠(수면) 등등, 이런 것들입니다. 공기, 물, 햇빛, 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수 있고, 누구나 차별 없이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위에 흔한 것 또는 주위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고 귀중합니다. 우리가 늘 먹는 밥이, 가끔 먹는 특식보다, 건강에 더 소중합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에서 늘 접하는
이웃이 우리의 삶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이야기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는 그만큼 많은 사람이 말하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말하고, 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재미가 있고 중요하므로 가능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고 국가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합니다. 여기
그런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전쟁에 참전 중인 형들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 중인 형들이 걱정되어, 이 소년에게 전쟁터에 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고, 형들과 형들의
상관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는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전쟁터에 이런 심부름 가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소년은 먹을 것을 가지고 전쟁터에 갔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나중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간 전쟁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지금의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블레셋에는 골리앗이라는 천하무적 거인 전사가
있었습니다. 골리앗의 키는 2.9m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깔보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 나설 만한 한 명을 뽑아서 나에게 보내라. 그가 나를 이기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다. 그러나 내가 그를 쳐 죽여 이기면, 너희는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겨라. 내가 오늘 너희 이스라엘
군대를 이처럼 모욕하니, 너희는 빨리 나에게 한 사람을 보내어 나하고 싸우게 하라.”
이스라엘 군대는 거인 골리앗이 두려워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렸지만, 이스라엘 군대의 군인들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자기 나라의 신을 모욕하자 옆에 있던 군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할례(남자 성기의 표피를 의례적으로 잘라내는 유대인의 관습)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한단 말입니까?”
다윗이 이처럼 허무맹랑한 말을 하자 이 사실은 금방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불러 그런 말을 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누구든지 저 사람 때문에 사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그만두어라. 네가 어떻게
저자와 싸운단 말이냐? 저자는 평생 군대에서 뼈가 굵은 자이지만, 너는
아직 어린 소년 아니냐?” 아무리 사정이 다급해도 사울 왕은 어린 소년 다윗을 골리앗과 싸우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뜻을 굽히지 않고 사울 왕에게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놈을 쳐 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냈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죽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으니, 저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도 그 꼴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자를 어찌 그대로 두겠습니까?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에서 저를 살려
주신 하나님께서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살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는 다윗을 보면, 크게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뭔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다윗의 거침없는 말에 사울 왕이 설득되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그렇다면, 나가도 좋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에게 중무장하고 싸움에 나가라고 말했지만, 다윗은 목동의 지팡이와 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과
마주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막대기만 들고 오다니, 네가
나를 개로 여기는 것이냐? 한심한 놈! 내가 너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마.”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골리앗에게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을 의지하고 나왔다. 주께서 너를 나의 손에
넘겨 주실 터이니, 내가 오늘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네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밥으로 주어서,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 하나님은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여기에 모인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모조리 우리 손에 넘겨 주실 것이다.”라고 대꾸했습니다.
드디어 골리앗이 몸을 움직여 다윗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재빠르게
골리앗 쪽으로 달려가면서, 주머니에서 돌을 하나 꺼낸 다음, 그
돌을 무릿매(stone-slinging)로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를 맞혔습니다. 골리앗은 이마에 돌을 맞고 땅바닥에 쓰러져 즉사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무릿매와 돌 하나로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이야기여서 기독교인은 물론 일반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근원적인 힘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지만, 그중 한 가지 답은 ‘자의식 또는 소속감’의 힘입니다. 무슨
‘자의식 또는 소속감’입니까? 자신이 신(神), 즉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의식, 즉 소속감입니다.
소속감은 소속감을 제공하는 대상의 힘(능력)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직원은 대기업에 소속된
신분으로 납품을 하는 중소기업 사장에게 큰소리를 치곤 합니다. 그러나 대기업에 다니던 직원이 퇴사하면, 대기업에 다닐 때 누리던 모든 힘을 잃습니다. 하인의 아들은 대개
주인집 아들에게 주눅이 듭니다. 하인의 아들은 낮은 신분의 자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 국민은 후진국 국민보다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곤 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선진국에 소속된 국민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소속감은 실존적 힘을 제공합니다.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없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근원은
아이에게 있지 않고 아빠에게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에는 천하무적 거인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블레셋 군대에 소속된
군인들은 자신들도 천하무적이라는 자의식을 갖게 되어 당당했습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 군대에는 거인
골리앗 같은 장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군대에
소속된 군인들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한 존재셨습니다.
다윗은 양들을 사자나 곰으로부터 지켜 낸 경험을 직접 말했습니다. 다윗은 사자나
곰이 양들을 물어가면 뒤쫓아가서 때려 쓰러뜨리고 사자나 곰의 입에서 양을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사자나
곰이 자기에게 달려들면 털을 움켜잡고 때려죽였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자나 곰을 때려잡았다는 말을 그대로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가 자기를 괴롭힌 동네 형이 눈앞에 있을 때, 아빠만 믿고 예전에 당했던 일에 대해 복수(?)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다윗이 사자나 곰과 싸워 이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평생을 하나님에 소속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에 속해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신 전지전능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윗이
어린 나이에 사자나 곰을 때려잡고, 거인 골리앗을 이긴 힘의 근원은 다윗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삶도 이런저런 이유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온갖 역경을
다 겪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 다윗은 사울 왕에게 십여 년간 쫓겨 다녔습니다. 왕이 된 후에 다윗 왕은 자식들로 말미암아 견디기 힘든 마음고생을 했습니다.
다윗 왕의 자녀들 사이에 근친상간이 있었고, 이 때문에 동생이 형을 죽이는 살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자식은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 왕은
압살롬을 피해 도주했고, 그때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후궁들을 대낮에 텐트 안에서 성추행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자행했습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중에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많은 시를 썼습니다.
이 시들은 성경의 시편에 있습니다. 다윗이 쓴 시 중에는 잠과 관련된 시도 있습니다. 다윗은 시를 통해 자신이 잠을 자고 깨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고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3:5-6 (표준새번역 성경): 내가 누워 곤히 잠 들어도 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주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적하여 사방에 진을
친 자들이, 천만 대군이라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시편 4:8
(표준새번역):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다윗이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중에도 평안히 누워 곤히 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시고
있다는 생각이 다윗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음과 생각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마음이 호수라면, 생각은 호수로 흘러 들어가거나 흘러나오는 물줄기입니다. 좋은 생각이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채워지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생각은 당연히 좋게 됩니다. 깨끗한 물이 호수로 흘러 들어가면, 호수는 깨끗해지고, 깨끗한 호수에서 흘러나오는 물 또한 깨끗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마음은 명사와 대명사로, 생각은
동사와 형용사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동적이고, 마음은
정적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듣고 보고 접하는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품을 때, “마음을 먹는다.”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마음을 음식에 비유한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듯이 좋은 생각과 감정은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합니다. 나쁜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고 설사를 하듯이 나쁜 생각과 감정은 정신과 영혼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병약한 사람이 보약을 먹으면, 원기를 회복합니다. 그럼 마음의 보약은 없을까요? 좋은 책은 마음의 양식, 마음의 보약입니다.
그럼, 좋은 책은 어떤 책입니까? 힘과
용기와 꿈과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주는 책입니다. 여러 번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입니다. 평생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처럼 평생을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입니다. 읽을수록
그 깊이가 더해져서 책 속에 숨겨진 보화가 계속 드러나는 책입니다. 과연 그런 책이 있을까요?
그런 책은 인간이 자기의 생각과 지식으로 쓴 책 중에는 없습니다. 인간이 쓴
책은 독자에게 어느 정도, 어떤 경우에는 상당한 유익을 주지만, 그
책을 쓴 동기가 자랑과 돈과 명예와 인기와 인정욕구 등에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그 책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책이거나 저명한 고전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주의 깊게 봐야 할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 주로 기독교에서 하는 말입니다만 -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생각해서 쓴 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주신
영감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지금까지 수억 아니 수십억의 사람들(주로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반복해서 읽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곰과 사자는 무서운 맹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워진 다윗의 마음에는 곰과
사자가 그저 두더지와 강아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생각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상대방(연인) 생각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상대방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고, 이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한편, 싸움과 전쟁은 마음 싸움, 즉
기(氣) 싸움부터 시작합니다. 동물들은 상대방의 심장 박동 소리를 예민하게 감지합니다. 개가 남자보다
여자를 더 공격하는 이유는, 여자들은 개를 보면 겁을 먹고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때문입니다. 심박박동이 빨라지면, 개는 이를 감지하고 상대방이 겁을 먹고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맹수를 만났을 때 맞붙어 싸울 생각보다는 도망갈 생각을 먼저 하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맹수를 만났을 때, 마주
노려보고 작은 막대기 하나라도 가지고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달려드는 맹수의 급소를 정확하게 찔러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마존에 사는 아나콘다라는 큰 뱀이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몸을 휘감고 있을 때, 사람이
정신을 잃지 않고 아나콘다를 이빨로 물면 아나콘다가 사람 이빨의 독(?)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도주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사람이 아나콘다에게 휘감기고 있을 때, 정신을 잃지 않고 이빨로 아나콘다를 물 수 있을까요? 아나콘다를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 만이 가능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은 근거 없는 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켜주고 보호하신다는 생각으로 채워져 있어 곰과 사자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에게 동네 형들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동네 형들보다 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몸집만 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골리앗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맞출 곳이 많다고 다윗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있을 때 아빠를 의지해 힘을 발휘하듯이, 하나님을 의지해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골리앗은 하나님에 비하면, 고양이 앞의 생쥐만도 못한 존재임을 다윗은
믿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채워진 다윗은 언제 어디서나 평안하게
잠을 잤습니다.
여름날 아이가 잠잘 때, 엄마는 옆에 앉아 파리, 모기 같은 벌레들이 아이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쫓아냅니다. 아이가
이불을 걷어차면, 배탈이 날까 봐 배에 이불을 덮어줍니다. 아이가
잠투정을 하면, 가슴을 부드럽게 두드리면서 안심시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엄마가 아이를 잠재우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잠재우고, 잠자는 중에 지켜 줄 것을 믿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단잠을 잡습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을 시로 노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까지도 지켜준다고 믿었습니다. 외적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마음이 편치 않으면 잠자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근심, 걱정, 불안, 염려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침대에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질 않습니다. 저도 여행을 가서 호텔에서 잘 때, 호텔 환경이 집보다 좋아도 익숙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평안하게 자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떤 환경, 상황에서도 평안한 잠을 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외적 환경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까지 지켜 주신다고 다윗은 믿음으로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시편의 시가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고 있을 때, 지은 시라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하고 있을 때,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습니까? 웬만한 사람이면 잠을 자기는커녕, 분노와
수치, 두려움 때문에 치를 떨면서 며칠 밤을 뜬눈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어주셔서 누워 자고 깼다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는 완전히 채워질 수 없습니다. 마음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면, 마음에는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마음에
공간이 생기면, 마음은 상황에 따라 출렁거리게 됩니다. 마음이
출렁거린다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물통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지
않으면, 물통이 움직일 때마다 물통이 출렁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물통은
마음이고, 물은 마음에 채워지는 대상이고, 출렁거림은 마음의
불안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물통에 물이 꽉 차 있으면, 물통이
움직여도 출렁거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하나같이 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얼마만큼의 돈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이 채워질까요? 어떤 사람이 돈이 많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면, 경쟁심이
유발되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합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라도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더 많은 돈을
추구하기 때문에 돈으로 마음을 채우기 어렵습니다.
또한,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서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더군다나 돈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므로 돈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돈의 증감에 따라 마음이 출렁거립니다.
돈이 아니면, 사람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공부 잘하는 자녀로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성공한 남편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을까요? 공부 잘하는 자녀와 성공한 남편도 불안전한 사람들이므로 불안전한 것으로 마음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게 됩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더는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를 내세웠지만, 죽음 또한 의심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어떤 사람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위대한 스승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안식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채운 다윗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잠을
잘 자기 위해서는 좋은 환경, 좋은 침대를 찾기보다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마음의 불안, 초조, 걱정, 염려, 스트레스
등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는 수면제에 의존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들어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신의 몸은 누군가 들어주어야지 올려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누군가 지켜줘야지 지켜집니다. 이 점은 다윗 왕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잠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아래와 같이 시로 노래했습니다.
시편
127:1-2 (개역개정 성경):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
솔로몬은 누구입니까? 솔로몬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인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지혜의 왕으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뛰어난 지혜를 ‘솔로몬의 지혜’라고
비유할 정도로 지혜가 많았던 인물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가?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룬 업적도 많았고, 그가 쌓은 부(富)는
실로 대단했던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가 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에게 잠을 준다”라고 했는지 우리로선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은 비유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고 있습니다. 청소하고, 집안
정리를 합니다. 엄마가 청소하고 집안 정리를 하는 데, 어린아이가
엄마 일을 거들겠다며 쫓아다닙니다. 어린아이는 나름대로 자기 생각에 따라 물건을 여기저기에 옮겨놓기도
하고 닦기도 합니다. 엄마는 어린 자녀가 엄마를 돕는 것을 대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엄마가 이미 정리해 놓은 것까지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자기
딴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어린아이는 잘 정리된 것들을 이리저리 흩트려 놓기 시작합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정리된 것보다는 어지럽게 놓여 있는 것이 보기가 좋은가 봅니다.
이제 엄마는 어린아이가 가만히 있는 것이, 즉 엄마를 돕지 않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렇지만, 엄마 마음을 알 리 없는 어린아이는 계속해서 집안을 어지럽히고 다닙니다. 엄마가 청소하고 정리한 것이 헛된 일이 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움직이는 한 엄마는 정상적으로 집안일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엄마는
어린아이를 가슴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잠을 재웁니다. 어린아이가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잠을 재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추석에 먹을 송편을 친척들과 함께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의 딸이 3살이었습니다. 3살짜리 딸은 한참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만지기를 좋아했습니다. 3살짜리
딸은 엄마 - 저의 아내 - 가 송편을 만드는 것을 물끄러미
보더니, 옆에 다 만들어 놓은 송편을 눌러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질겁을 해서 딸 아이가 그런 짓을 못 하게 했습니다. 딸 아이는 그것이 자기를 야단치는 줄 알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딸 아이가 송편 만드는 데 방해가 되니, 저에게 딸 아이를 돌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 아이를 등에 업고 이리저리 거닐었습니다. 등에 업힌 딸아이는
여러 어른이 모여 있는 곳에 끼고 싶어서 내려 달라고 칭얼댔습니다. 저는 딸 아이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잠을 재우기 시작했습니다.
딸 아이는 칭얼대기를 몇 분 동안 하더니 이내 업힌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제야
어른들은 마음 놓고 송편을 만들 수 있었고, 딸 아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송편 만들기를 무사히 끝냈습니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일찍 일어나 일하고 늦게 눕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자기 뜻대로 잘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은, 하나님이 보실 때, 위에서
본 어린아이와 딸 아이의 행동과 같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쓸수록 일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일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하나님을 배제한 채,
과학 기술과 문명을 발달시켰습니다.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인간은 삶의 편의와 풍요로움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
따라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어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독단적인 주인의식을 가지고 손대는
것에는 부패와 타락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도록 간섭하십니다. 여기서
“일이 잘된다.”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일이 잘 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일이 잘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자녀가 공부 잘하면,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이성과 지각 능력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은 일종의 신비입니다.
우리의 일이 잘되도록 우리 일에 하나님이 간섭하듯이, 부모와 자녀 간에도 간섭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녀가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식할
때, 자녀의 건강을 염려하는 부모는 자녀가 먹는 음식을 빼앗거나 절제하도록 야단을 칩니다.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부모의
간섭이 자녀의 처지에서는 못마땅하고 원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행동에 간섭하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입장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하지 않고 우리의 일에 끊임없이 간섭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관심을 갖게 되고 끊임없이 간섭하게 됩니다. 물론,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간섭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반드시 간섭을 수반합니다. 즉, 간섭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면 반드시 간섭하게 됩니다. 간섭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애인이 자기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면, 그 애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는 반드시 간섭이 있게 마련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는 끊임없는 잔소리와 관심과 바라봄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애인 사이의 간섭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애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간섭하는 것은 한마음이 되는 과정입니다. 간섭을 통해
한마음이 되면, 상대방의 눈빛만 봐도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수준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자신 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면, 뜻하지 않은 재미와 기쁨을 맛봅니다. 상대방을 위해 서로 뭔가를 할 때,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과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저는 아들과 배드민턴을 치면서 체험했습니다.
재미로 배드민턴을 칠 때, 상대방과 셔틀콕을 오래 주고받는 것이 좋습니다. 셔틀콕을 상대방과 오래 주고받으려면, 상대방이 잘 받아 칠 수 있도록
상대방에게 셔틀콕을 정성스럽게 쳐서 넘겨주어야 합니다.
내 기분대로 내 마음대로 상대방의 위치와 자세를 신경 쓰지 않고 셔틀콕을 치면, 상대방이
셔틀콕을 잘 받아 칠 수 없으므로 배드민턴을 재미있게 오래 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위치 자세 등을
염두에 두고 상대방이 셔틀콕을 가장 잘 받아 칠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상대방에게 셔틀콕을 넘겨주고,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신경 써서 셔틀콕을 받아쳐야만 재미를 느끼면서 배드민턴을 오래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주고받음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주고받음의 법칙’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주고받음의 법칙’에서 주의할 점은 ‘받기’ 보다 ‘주기’를 먼저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서 먼저 받으려고 하거나 얻으려고
하면, 상대방은 이를 눈치채고 경계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긴장하고, 의심하고, 서로 뺏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상대방에게서 먼저 받으려고 하거나 챙기려고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뭔가를 먼저 줄 때, 상대방은 감동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만, 여기서도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렇게 먼저 주면, 상대방도 나에게 뭔가를 줄 거야.’라는 투자방식 생각입니다. 이런 투자방식 생각은 ‘주고받음 법칙’의 정상적 작동을 위해 삼가야 합니다.
인간은 영리해서 뭔가를 은근히 바라면서 선의를 베풀면, 상대방은 그것을 금방
눈치채고, 선의를 고마워하기보다 치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선의는 득이 되지 않고 해가 됩니다. 상대방에게 사심
없이 단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의를 베풀면, 상대방은 보답하게 되고, 이러는 가운데 삶의 재미와 기쁨을 보너스로 얻게 됩니다. 이것은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우리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자기가 먼저 챙기려고, 자기가 먼저 얻거나 받으려고 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항상 행복하고, 기쁘게 살려면,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먼저 베풀고 먼저 주어야
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까지 일합니다. 현대사회가
무한 경쟁 사회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수험생들도 합격을 위해 밤잠을 줄이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고와 노력이 성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그 또 다른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도 일할 수 없을 때, 아무도 공부할 수
없을 때, 즉 잠을 자고 있을 때, 그때 누군가 나를 위해
일해주느냐입니다.
솔로몬은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돈이나 건강이나 우리 인간이
선호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왜 잠을 주신다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직접 일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잠든 상태에서 하나님은 일을 마무리하기 원하십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딸
아이가 잠든 상태에서 엄마와 어른들이 청소와 송편 만드는 것을 완수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잠을 푹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의욕이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잠자는 동안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잠자기 전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던 것들이 잠을 자고 난 후에 말끔히 정리된
듯한 느낌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준다.”라고 시를 쓴 솔로몬은 지혜로운 왕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준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는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자는 중에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복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재물이
많은 걸까요? 자식이 잘되는 걸까요? 성공하는 걸까요? 사전은 복을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을 다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런 복들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아닐까요? 기독교적 개념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개개의 복보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 가장 크고 근원적인 복입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인 이유는 부작용이 없고 부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된 복 이외에 우리가 선호하는 복 - 재물 복, 자식 복 등 - 은 부작용이 있고,
부패가 있으므로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대개 복 받았다고 하지만, 그
돈 때문에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질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잘되는 것이 부모에게 큰 복이라고 하지만, 자식이 잘되면
그 자식이 어느 순간에 교만해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여 부모를 버릴 수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는 것도 복이랄 수 있지만,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 그만큼 가정에 소홀할 여지가 있고, 그럼으로써 가정의 행복이 깨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복된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관자로 모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주관자로 모시면서 속박되느니 차라리 자신이 주인 역할을 하면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어린아이들에게서 쉽게 목격됩니다. 그것을 쉽게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이가 있으면, 돈을 주면서 잘 사용하라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백이면 백 모든 아이가 “이 돈을 어떻게 쓰는 게 잘 쓰는
거예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돈을 손에 쥐자마자
자기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돈 쓰는 곳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개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는 곳에 돈을 씁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성공하려고 합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피곤한 삶을 삽니다. 피곤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누군가 자신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 아들도 부모인 제가 충고를 하면, 웬만해서는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생활이 피곤하고 힘든데도, 도움을 주려는 누군가의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것은, 과연 자기 뜻 맞습니까? 상황이 어렵고 희망이 없어 보여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하나님이 주관자이심을 인정하고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과연 자기 뜻입니까? 나는 내 편
맞습니까? 내가 내 편이라면, 굳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 내부를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이 깨어 있음이 헛되다.”라는 시를 썼습니다. 솔로몬은 왜 이런 시를 썼을까요? 우리 마음에는 우리가 원치 않는
악한 영, 즉 우리를 공격하는 내부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부의 적은 무엇입니까? 염려, 걱정, 근심, 불안, 두려움, 스트레스 등이 아닐까요? 아무리 좋은 집을 가지고 있어도, 그 내부에 적이 우글대고 있다면, 그 좋은 집은 금방 허물어집니다. 성이 아무리 견고하고 파수꾼이 철통같이 경계를 해도 내부의 적이 안에서 성문을 열면, 적들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성을 함락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부의 적은 어떻게 생길까요? 모든 인생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데서 생깁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염려, 걱정, 근심, 불안, 두려움, 분노, 원망, 스트레스 등 각종 내부의 적이 생깁니다. 이처럼 내부에, 즉 마음에 적이 생기면, 우리의 마음은 전쟁터가 됩니다. 마음이 전쟁터가 되면, 우리에게는 쉼이 없습니다. 안식과 평안과 여유로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부의 적을 없앨 수 없을까요? 있습니다. 내부의
적은 내가 스스로 주인 되어 모든 것을 하고자 할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인 됨을 포기하면, 내부의 적은 자연스럽게 소멸합니다. 문제는 내 의식이 깨어있고 활동하는
중에 자아는 스스로 주인 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내부 적을
소탕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의식이 있을 때 주인 됨을 포기하고 자기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내부 적이 없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주인
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잠을 자는 상태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마취된 환자를 수술하듯이, 잠이 든 사랑하는 자의 내부 적을 소탕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고, 잠이 들면 내부의 적(문제)을 처리하십니다. 잠자는
시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를 위해 직접 활동하시는 시간입니다. 잠자는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교두보를 구축하시고, 내부의 적을 진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을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개운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잠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臨在, presence of God)를 체험해야 합니다. 잠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 삶에는
진정한 여유와 안식과 평화와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두 번째 비밀:
다윗과 솔로몬의 잠, 끝>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