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섯 번째 비밀_야곱의 꿈, 요셉의 꿈

다섯 번째 비밀:
야곱의 꿈, 요셉의 꿈
(꿈 해석으로 벼락 출세한 부자(父子))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다.”라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돈으로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잠은 살 수 없다.”라고 해야 합니다. 잠이 안 올 때 사람들은 수면제를 사서 먹거나 수면 과학요법, 최면요법 등과 같은 방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잠을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침대와 좋은 분위기의 쾌적한 환경과 조건에서 잠을 잘 잘 수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적인 환경과 조건이 좋더라도 마음 상태가 불안정하면 좋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반대의 경우, 즉 아무리 환경과 조건이 열악하더라도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으면 깊고 좋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의 잠베드로의 잠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최악의 환경인 감옥에서 잠을 잘 잤고, 예수님은 풍랑 속의 배에서 잠을 잘 주무셨습니다.

침대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외적인 것이라면,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침대입니다. 외적인 침대 또는 외적인 잠자리가 좋지 않아도 내부의 침대가 좋으면, 즉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으면 좋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물론, 외적인 환경과 조건도 좋고 마음의 상태 또한 평안하고 안정되고 고요하다면 더욱더 좋은 잠을 잘 수 있습니다.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침대입니다.


잠자리의 외적인 환경과 조건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물건과 장치가 필요합니다. 좋은 침대는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침실의 실내 디자인이 좋아야 하고 조명도 좋아야 합니다. 침실 온도를 잠자는 데 알맞게 하기 위한 냉난방시설도 필요합니다. 이런 물건과 장치, 시설을 갖추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므로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부자들이나 잠자리의 외적인 환경과 조건을 좋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은 가지고 있는 돈을 지키기 위해, 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마음이 늘 불안정하고 긴장 상태에 있게 됩니다. 또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게 너무 많아 마음이 늘 분주합니다. 현시대는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돈은 우리의 마음을 바쁘게 만듭니다.

소명의식 없이 돈만 벌려는 사람들은 우리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것들을 대량으로 쏟아냅니다. 대중매체는 우리의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들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공급합니다. 영화, 오락, 음악, 여행, 음식, 취미, 스포츠 등 돈으로 우리의 육체와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유혹하는 것들을 다 누리려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결국, 외적인 잠자리 환경을 좋게 할 수 있는 돈 있는 사람은 역설적일지 몰라도 좋은 잠을 잘 수 있는 사회 환경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음식 재료가 있으면, 주부는 그 음식 재료를 사용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사냥꾼에게 좋은 총이 생기면, 그 총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미모가 있는 여인은 자신의 미모를 보여 주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쓰고 싶어 합니다. 돈 있는 사람은 외적인 잠자리 환경을 좋게 꾸밀 수 있어도, 마음의 평안과 안정을 필요로 하는 내적인 잠자리를 꾸미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많으면 내적인 잠자리를 좋게 꾸미기 힘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갑자기 많은 돈이 생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머릿속은 갑자기 돈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신나는 일들로 꽉 찹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흥분되고 들뜹니다. 물론 비싸고 좋은 침대를 사야겠다는 생각도 하겠지만, 잠을 푹 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생을 다양하고 멋지게 그리고 신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자던 잠도 줄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많은 돈이 생기는 것은 좋은 잠과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외적인 환경과 조건이 너무 나쁜 곳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사람, 야곱입니다. 야곱은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 민족은 야곱을 굉장히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야곱이 광야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잔 경험 - , 노숙한 경험 -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28:10-16 (표준새번역 성경):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위의 성경 내용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친숙한 내용이어서 그 전후 배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그 전후 사정을 잘 모를 수 있으므로 배경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야곱의 부모는 이삭과 리브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으로 인정되고 있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 부부는 쌍둥이 형제를 낳았습니다. 형의 이름은 에서이고 동생이 바로 야곱입니다. 형 에서는 성격이 활발하여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반대로 야곱은 성격이 조용하여 집(장막)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격이 조용한 아버지 이삭은 자신의 성격과 반대되는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성격이 쾌활한 어머니 리브가는 성격이 유순한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이 같은 야곱 부모의 자식에 대한 편애는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죽기 전에 형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과 짜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야비하게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그 전에도 팥죽 한 그릇으로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치사한 일 - 장자권(長子權)을 이어받는 일 - 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가로채인 사실을 알게 된 형 에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아버지(이삭)가 돌아가시면 동생 야곱을 반드시 죽여버리리라.’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어머니 리브가는 하란에 있는 외갓집으로 야곱을 피신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 수천 리 길 외갓집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서 노숙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보다는 어머니 리브가가 훨씬 많은 주도권을 행사하던 집안에서 어머니의 편애를 받던 야곱이 홀로 여행을 떠날 때, 심적으로 상당히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갓집을 찾아가는 야곱에게는 이런저런 생각과 두려움과 걱정거리가 많았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걱정거리가 많게 되면, 꿈을 많이 꾸게 됩니다.  

게다가 야곱은 거친 광야에서 돌로 베개 삼아 잠을 자야 했으니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깊은 잠을 못 자고 얕은 잠, 즉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고, 그때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은 깊은 잠보다는 얕은 잠에서 꾼다는 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야곱이 광야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잘 때 꿈을 꾸었다는 성경 기록은 과학적으로도 맞는 내용입니다.

꿈과 수면은, 일반인들이 평상시 깊이 생각하는 주제가 아니므로, 여기서 잠시 과학적으로 밝혀진 꿈과 수면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꿈과 수면은 우리가 늘 접하는 것이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가 적기 때문입니다.

꿈은 백과사전에 수면 시 경험하는 일련의 영상, 소리, 생각, 감정 등의 느낌을 말한다.”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보통 꿈이라고 할 때는 수면 중에 꿈꾼 체험이 깨어난 후에도 회상되는 회상몽(回想夢)입니다. 수면 상태에 들어가면 뇌의 활동상태가 각성 시와는 달라집니다. 이때, 일어나는 표상(表象)의 과정을 '꿈 의식'이라 하며, 깨어난 후에 회상되는 것이 '꿈의 내용'입니다.


꿈은 빠른 눈 움직임이 나타나는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 상태에서 꿉니다.

꿈은 주로 빠른 눈 움직임이 나타나는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 상태에서 꿉니다. 꿈꾸는 것을 방해하면 여러 가지 신경정신질환이 나타납니다. 꿈을 꾸는 렘수면 시 뇌파를 측정하면, 기억파라고도 불리는 세타파가 잘 측정됩니다. 이 때문에 꿈이란 기억한 것을 자는 동안 다시 한번 기억시키는 과정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꿈이란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더욱 잘 기억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갓난아기인 경우 성인보다 꿈을 잘 꾸는 렘수면이 더 긴데, 이것은 뇌 회로가 잘 발달하지 않은 아이의 두뇌에 기억이 더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좋은 수면은 비-(Non-REM)수면 - 느린 진폭의 델타파가 나오는 수면 - 과 렘수면이 적절하게 교대로 나타나는 수면입니다. 렘수면이 전체의 20%를 넘지 않으면, 좋은 수면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를 계속 받아들이는 갓난아이는 뇌 신경 세포가 빨리 피곤해지므로 많은 시간을 자면서 보냅니다. 이런 까닭에 갓난아이의 수면에서는 꿈을 많이 꾸는 렘수면이 약 절반 정도를 차지합니다.

어른의 경우, 렘수면이 많아지면 쓸데없는 꿈을 꾸게 되고 꿈속에서 자극을 많이 받으므로 팔다리 근육의 긴장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렘수면이 많으면, 성인들은 깊은 잠을 못 자고, 이 때문에 뇌 신경 세포의 피로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이처럼 렘수면이 많으면, 뇌 신경 세포의 피로가 잘 풀리지 않으므로 심한 경우 자살 충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렘수면을 방해하면, 이것은 꿈꾸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불안, 초조, 불만 등이 나타나면서 불안신경증, 긴장성 두통, 무력감, 우울증과 같은 여러 가지 신경정신질환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면, 현실에서도 꿈을 잃지 말아야 하지만, 잠을 자는 중에도 꿈을 잘 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적절한 꿈은 인생에 큰 활력소를 제공해주고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학은 렘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며, 이때 빠른 눈 움직임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렇지만, 꿈을 꿀 때 왜 빠른 눈 움직임이 나타나는가?’에 대해 과학은 몇 가지 가설만 세울 뿐 그 이유에 대해 속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혹시 이런 이유로 렘수면 동안 빠른 눈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자고 나면 대개 눈곱이 끼어 있습니다. 이것은 각질화되어 떨어져 나온 눈의 표피 세포와 눈에 묻어 있던 이물질이 잠자는 동안 눈 밖으로 배출되어 굳어진 것입니다. 눈동자에 붙어있던 눈 표피 세포의 각질과 이물질이 바깥쪽으로 배출되려면, 결국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여서 이것들을 바깥쪽으로 밀어내야 하는데, 이런 동작이 렘수면 중에 이루어진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어쨌든, 과학은 관찰과 측정 및 실험 등을 통해 꿈과 수면에 대한 이해의 폭을 꾸준히 넓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꿈은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가? 잠과 꿈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좋은 환경에서 자야만 행복한 삶인가? 과 같은 질문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 과학은 꿈을 꾸는 이유와 꿈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현재로선 우리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꿈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꿈속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합니다. 꿈속에서는 하늘을 날기도 하고, 우주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귀신이 나타나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아름다운 물고기와 무서운 짐승을 만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꿈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은 꿈을 무의식이 활동하는 가장 큰 무대라고 했습니다. , 이들은 꿈을 깨어 있을 때의 자아 활동 및 의식 활동이 수면 중에는 저하되기 때문에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것들(욕망, 불안 등)이 변형된 모습으로 떠오르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꿈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정신생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융은 꿈을 통해서 무의식이 지시하는 바의 의미, 즉 의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삶의 진실에 귀 기울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프로이트와 융은 꿈은 무의식의 활동 무대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꿈을 해석하고 분석했습니다. 꿈을 무의식과 연관하여 이해하고 해석하고 분석한 이들의 업적을 통해 인류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꿈은 무의식이 활동하는 무대일 뿐일까요?

현실 생활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꿈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꿈속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면, 꿈은 현실 세계의 측면에서 볼 때, 기적이 이루어지는 무대입니다.

꿈은 현실 세계의 측면에서 볼 때,
기적이 이루어지는 무대입니다.

야곱의 꿈에서도 현실 생활에서 접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야곱의 꿈속에서는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가 서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닥다리 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야곱의 미래와 야곱의 후손에 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성경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적과 꿈의 이야기가 그런 것들에 해당합니다. 기적은 사전에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의 힘이 작용했다고 하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기적과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물 위를 걸으신 기적 그리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등은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성경의 기적들입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씀드린 야곱의 꿈도 초자연적 힘이나 신의 힘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기적은 과연 있을까요? 기적은 실제 가능할까요?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만 생각할 때, 기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차원의 세계에 있는 존재들은 높은 차원의 세계에 있는 존재들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표면(2차원 평면)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개미는 공중(3차원 공간)을 펄쩍펄쩍 뛰면서 움직이는 메뚜기의 동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메뚜기가 공중을 펄쩍 뛰어오를 때, 개미의 눈에는 메뚜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메뚜기가 공중에서 다시 땅에 착지하면, 개미는 사라졌던 메뚜기가 다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개미의 눈에는 메뚜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차원적으로만 움직이는 개미의 눈에는 3차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메뚜기의 움직임이 신비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성경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문을 꼭꼭 닫고 있는 장소에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 오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20:19). 이 성경 내용에서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데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 오셔서 의심이 많은 제자에게 못이 박혔던 자신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이 많은 제자에게 못이 박혔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홀로그램 영상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육체를 지니신 채로 나타나셨습니다.

3차원에 사는 우리로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문이 닫혀있는 곳에 들어오실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원을 초월하시는, 아니 차원을 창조하신 예수님은 문이 닫혀있는 3차원 공간을 뚫고 들어 오시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닫힌 공간에 들어오신 기적을 좀 더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개미가 굵은 선(개미의 몸길이보다 더 굵은 선)으로 그려진 원안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겠습니다. 이 개미는 굵은 선을 밟지 않고 원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2차원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개미는, 선을 밟지 않고 원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3차원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면, 즉 인간이 개미를 집어 올려 원 밖에 꺼내 놓는다면, 개미는 굵은 선을 밟지 않고 쉽게 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원 안의 다른 개미들은 동료 개미 한 마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원 밖에 나타난 광경을 보고 기절초풍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4차원 이상의 차원에서 움직일 수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문을 열지 않고 3차원 공간인 방에 쉽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4차원 이상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으신 예수님에게 닫혀 있는 3차원 공간은, 마치 개미를 가두어 놓은 원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에 속박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말도 안 되는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런 능력조차 없으시다면 과연 우리가 그런 존재를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기독교는 기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성경을 토대로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논리적으로 논증한 C.S. 루이스는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아래와 같이 논증하고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기적 논증을 통해 기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은 뿌리를 통해 포도나무에 흡수됩니다. 흡수된 물은 몇 달 동안 포도나무에서 토양과 햇빛, 공기 그리고 기타 포도 열매에 필요한 요소들과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포도 열매에 포함됩니다. 포도 열매가 적절히 익으면, 농부는 포도 열매를 수확합니다. 수확된 포도 열매는 포도주 공장으로 운반됩니다. 포도주 공장에서 포도 열매는 포도주가 되기 위한 상태로 처리되어 여러 날 동안 숙성과정을 거쳐 마침내 포도주로 변화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매년 자연 질서의 일부로서 포도주를 만듭니다. , 그분은 물과 토양과 햇빛을 주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식물 유기체인 포도를 창조하시며, 그렇게 만들어진 포도 주스는 적절한 조건이 맞춰지면 포도주가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늘 이렇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십니다. 모든 음료가 다 그렇듯 포도주 역시 결국 물이 변해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은 어느 해 한 번 그 과정을 생략하고 단축했습니다. , 예수님은 물이 포도나무에 흡수되어 포도 열매에 포함되는 등의 중간 과정들을 생략하시고, 물을 곧바로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기적이란, 말하자면 지름길로 가는 것입니다.” (기적: C.S. 루이스 저, 홍성사)

기적은 초자연적인 힘이나 신의 힘이 있어서 작용했다고 하지 않으면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이다.”라고 정의된다면, 꿈속에서 기적과 같은 사건이 자주 일어납니다. ,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어려워 보이는 것 혹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속에서는 쉽게 경험합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꿈속에서는 쉽게 경험합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먼 과거로 갈 수 없지만, 꿈속에서는 쉽게 갈 수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없지만, 꿈속에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는 대개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험을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쫓기는데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다가 깨어납니다. 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부모님은 자신이 할 말만 하시고 사라지십니다. 야곱도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만 듣고 깨어납니다. 야곱이 꿈속에서 능동적으로 한 것은 없습니다.

꿈은 많은 점에서 영화와 유사합니다. 꿈속에서 펼쳐지는 시각적 이미지는,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화의 영상과 유사합니다. 영화에 등장인물과 배경이 있듯이 꿈속에도 등장인물과 배경이 있습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지만, 꿈은 잠 속에서 상영됩니다. 영화는 극장에서 관객들이 보고, 꿈은 꿈꾸는 사람만 봅니다. 꿈은 단 한 사람만의 관객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은 많은 점에서 영화와 유사합니다.

꿈에서는 자신이 직접 주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는 감독이 누구인지를 자막을 통해 관객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꿈은 감독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꿈의 감독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프로이트와 융의 덕분에 무의식이 영화 촬영지 혹은 영화 제작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의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로선 꿈의 감독이 누군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감독이 없는 영화가 없듯이 꿈에도 반드시 감독이 있어야 합니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기 생각과 사상 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마찬가지로, 꿈 감독도 꿈을 통해 유일한 관객인 꿈 꾸는 사람에게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대개 파악할 수 있지만, 꿈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메시지 없이 관객의 돈만 노리는 저질 영화가 있듯이, 꿈에도 개꿈이라 불리는 꿈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보통 개꿈’을 그저 아무것도 아닌 꿈으로 생각합니다. , ‘개꿈은 좋은 꿈도 아니고 나쁜 꿈도 아닌, 한마디로 메시지도 없고, 해석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꿈이라는 생각해버립니다.  

꿈에도 감독이 있다면, 왜 꿈 감독은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을까요? 다른 분야에서, 특히 심리학 분야에서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꿈은 하나님께서 연출하시고 감독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이런 전제하에 꿈의 메시지를 - 우리 관점에서 - 난해하게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 특히 하나님의 언어를 우리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언어는 인식기능과 지각기능을 통해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영감(靈感)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외국어에 능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중국어에 능통하려면 반드시 제 안에 중국어가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중국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어에 대해 저의 안과 밖이 막힘 없이 통해야만 중국어에 능통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특히 하나님의 언어에 능통하려면 하나님의 언어가 제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언어에 능통하려면 반드시 자신 안에 그 언어가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중국사람의 어떤 영혼이 내 안에 들어와 있으면(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할 때), 중국어를 중국사람처럼 능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언어에 능통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하나님 언어로 표현되는 꿈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 유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꿈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감옥에 갇힌 노예 신분이었던 사람이 단번에 그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이집트 총리가 된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셉이라는 인물입니다.

요셉은 앞서 언급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11번째였습니다. 어머니는 라헬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어서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밭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자기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들 곡식 단은 자신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하였다는.” 꿈 얘기를 자랑스럽게 했습니다. 또한,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했다.”라는 다른 꿈 얘기도 했습니다. 이런 꿈 이야기를 하자, 형들의 요셉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런 꿈 이야기는 형들을 비하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형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팔았고, 노예상인들은 요셉을 이집트 파라오의 경호원인 보디발이란 사람에게 되팔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요셉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보디발의 집안일을 도맡아 보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잘생긴 외모에 반해 요셉을 동침하자고 유혹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을 수 없다면서 보디발 아내의 동침 유혹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보디발 아내는 요셉을 강간 미수범으로 몰았습니다. 이 때문에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파라오를 모시다가 잘못을 저질러 투옥된 2명의 파라오 신하를 만났습니다. 감옥에서 그 신하들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요셉이 이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요셉의 꿈 해석은 적중해서 한 신하는 사면 복권되고 다른 한 신하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한편, 왕궁에 있던 파라오도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파라오는 꿈속에서 흉측하고 삐쩍 마른 7마리의 소들이 잘 생기고 통통하게 살진 7마리의 소들을 잡아먹는 모습을 봤습니다. 또 다른 꿈에서는 마르고 시든 7개의 흉측한 이삭이 토실토실하고 굵은 7개의 좋은 이삭을 삼켜 버리는 광경을 봤습니다.

꿈에서 이런 이상한 모습을 본 파라오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모든 지혜자들과 마술사들을 불러 자신의 꿈을 풀어보게 했지만, 아무도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전에 요셉과 같이 감옥에 있다가 꿈의 내용대로 사면 복권된 신하가 파라오에게 요셉을 소개했습니다. 사면 복권된 신하의 소개로 파라오 앞에 불려 온 요셉은 앞으로 7년 동안 풍년이 있을 것이고, 뒤이어 7년 동안 흉년이 있을 것이다.”라고 꿈 풀이를 했습니다.  

파라오는 꿈 풀이를 지혜롭게 한 요셉의 지혜가 신(하나님)의 영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고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사유재산의 국유화 조치로 7년 동안의 극심한 흉년에서 이집트를 구했습니다. 또한,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까지 온 형들을 만나 그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 모두를 이집트로 불러 이집트에서 살게 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온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이 신하들의 꿈을 해석할 때,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의 꿈을 해석할 때도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꿈을 해석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요셉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꿈을 해석할 것임을 알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파라오도 요셉을 보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파라오도 요셉의 지혜로운 꿈 해석이 하나님의 영에 의한 것임을 눈치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요셉 자신의 진술과 파라오의 진술을 통해서 우리는 요셉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 꿈을 하나님이 감독한 하나님의 언어로 된 작품이라고 전제할 때 -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셔 올 수 있을까요? 다소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습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 즉 내 안에 외국어를 들여놓기 위해서는 내가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직장에서 어떤 직원이 사장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름대로 큰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직원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장이 그 직원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면, 그 직원은 사장의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 아무리 지혜롭고 똑똑한 신하가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도 왕이 자신의 마음을 그 신하에게 주지 않으면 신하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됩니다. 물론, 직원의 노력과 신하의 노력이 사장과 왕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어쨌든 마음을 주느냐 마느냐의 최종 선택권은 사장과 왕에게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도 윗사람이 주지 않으면, 아랫사람은 아무리 큰 노력을 해도 윗사람이 가진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아래에 있는 땅은 물을 풍족하게 얻을 수 없습니다. 위쪽에 있는 물이 댐에 의해 갇혀서 흘러내리지 않으면, 댐 아래쪽은 말라버립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끼 새들이 먹이를 자기에게 달라고 입을 아무리 크게 벌려도 어미 새가 선택한 새끼만이 어미 새가 물고 온 먹이를 받아먹습니다. 정리하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기를 선택하는 것이지, 얻고자 하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새가 선택한 새끼만이
어미 새가 물고 온 먹이를 받아먹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을 선택하여 자신의 영을 주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태양이 모든 만물에 차별 없이 빛을 비추듯이,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곳에 충만하게 계십니다. 그러나 지하 동굴에 있는 사람은 태양 빛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벽에 갇혀 있는 사람, 즉 하나님께 관심이 없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즉 하나님에 대한 마음 상태가 암흑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거할 마음의 공간이 없는 사람과, 머릿속이 온통 자기 생각으로 꽉 차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도 하나님의 영이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우리의 몸을 보듯이 우리의 마음을 환히 보십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과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훈련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언어로 된 꿈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꿈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면, 현실 생활에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꿈(비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꿈을 통해서 발견한 현실 생활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이루십니다. 따라서, 현실 생활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잠자는 동안의 꿈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꿈에는 미래에 벌어질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의 꿈과 요셉의 꿈은 물론 감옥에서 만난 두 신하의 꿈 및 파라오의 꿈에도 예언이 담겨있습니다. 예언이란 무엇입니까? 예언이란 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가 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또는 그런 말로 정의됩니다.

꿈에는 미래에 벌어질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예언은 예언에 담긴 내용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 또는 그 존재로부터 위임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점성술사 혹은 점쟁이들도 예언하지만, 이들은 영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귀신()을 통해서 예언하기 때문에 진정한 예언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단지 우리 인간이 볼 수 없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지 미래를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예언대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진정한 예언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두 신하의 꿈을 듣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언했습니다. 한 신하의 꿈은 이러했습니다: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고, 그 포도나무에는 가지가 셋이 있었다. 가지에서 싹이 나더니, 곧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다. 파라오의 잔이 나의 손에 들려 있기에, 내가 그 포도송이를 따다가, 파라오의 잔에 포도즙을 짜서, 그 잔을 파라오의 손에 올렸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셉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가지 셋은 사흘을 말합니다. 앞으로 사흘이 되면, 파라오가 당신을 불러내서, 직책을 되돌려 줄 것입니다. 당신은 예전에 술잔을 받들어 올린 것처럼, 파라오의 손에 술잔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 신하의 꿈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빵이 담긴 바구니 세 개를 머리 위에 이고 있었다. 제일 위에 있는 바구니에는, 파라오에게 드릴 온갖 구운 빵이 있었는데, 새들이, 그 바구니 안에 있는 것들을 먹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요셉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바구니 셋은 사흘을 말합니다. 앞으로 사흘이 되면, 파라오가 당신을 불러내서, 당신 목을 베고 나무에 매달 터인데, 새들이 당신의 시체를 쪼아 먹을 것입니다.”

요셉이 두 신하의 꿈을 기초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언한 후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그 날은 파라오의 생일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잔치를 베풀고, 신하들을 초대했습니다. 술잔을 올리는 신하와 빵을 구워 올리는 신하도 감옥에서 나와 잔치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파라오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신하는 직책이 회복되었고, 빵을 구워 바치는 신하는 매달려 처형되었습니다.

요셉이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감독한 꿈에 담긴 예언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영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꿈과 영화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영화는 그냥 영화일 뿐 현실 세계와 연관성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도 예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럴 가능성을 나타낼 뿐 현실 세계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영화감독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 등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메시지를 영화에 담을 수 있지만, 미래를 통제하고 주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꿈에 담긴 예언의 메시지는 현실 세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꿈의 감독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관자로서 미래를 통제하여 꿈에 담긴 예언을 현실 세계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소설가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의 내용이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꿈과 현실 세계를 통제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꿈속의 예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마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둡고 깜깜한 밤길을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번개가 순간적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번개가 순간적으로 비추는 순간 우리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고,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삶은 보다 안전하고, 불안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기 전에 꾼 꿈의 내용: “밭에서 곡식 단을 묶을 때 자기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자신의 단을 둘러서서 절했다.”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했다.”라는 것은, 십여 년이 지난 후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 형들이 이집트 총리가 된 자기에게 와서 절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꿈속 예언이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편, 앞에서 꿈에는 개꿈이라 불리는 꿈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개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꿈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꿈도 아니고 나쁜 꿈도 아닌, 한마디로 해석할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꿈을 개꿈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교해 성경에 등장하는 꿈은 개꿈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 성경에 등장하는 꿈은 의미가 있고 해석이 필요한 꿈이었습니다. 꿈의 이해와 해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만 정확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개꿈은 왜 꾸는 것일까?”

개꿈은 왜 꾸는 것일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의미가 없는 개꿈을 왜 꾸는지 저로서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양자역학과 같은 고등 물리학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뛰어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미적분과 같은 고등 수학은 수학자들에게나 각별한 의미가 있지, 수학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골치 아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개꿈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가방 제작자가 아무리 싼 가방을 만들 때라도 필요가 없는, 즉 의미가 없는 것을 가방에 붙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물을 청하는 나그네(후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여인이 물을 줄 때, 쓸데없어 보이는 버들잎 한 줌을 물에 띄운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듯이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에 어떤 것도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개꿈은 개꿈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단지, 우리가 개꿈이란 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실력이 없어서 형편없는 이름을 붙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개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개꿈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둔다면, 언젠가 하나님의 영이 도우셔서 개꿈에서도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꿈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의미는 사람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식사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단지 살기 위해 습관적으로 식사한다면, 그 시간은 음식을 먹는 동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식사하듯이, 동물들도 살기 위해 습관적으로 먹이를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의 질을 따지면서, 사람의 식사와 동물이 먹는 행위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식사의 질이란 무엇입니까? 맛있게 즐겁게 먹는다면, 그것이 최고의 식사의 질 아닐까요? 사람들이 좋은 질의 식사를 할 때, 돼지들이 먹을 때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요?

저는 사람들이 식사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의미 없이 단지 살기 위해 미각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면, 동물들이 먹이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식사할 때, 음식을 준비한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이 음식의 재료를 생산하기 위해 땀 흘린 농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음식의 재료(, 채소 등)에 흡수되었던 햇빛과 공기와 물과 흙의 양분 등 자연의 위대함, 신비함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사람의 식사는 동물이 먹이를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에는 사실 엄청난 양의 햇빛과 공기와 물과 양분과 시간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채소도 마찬가지고, 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날 동안 햇빛이 필요했고 물이 필요했고 흙의 양분이 필요했습니다. 어찌 보면 쌀 한 톨과 채소와 과일에는 자연과 우주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의 먹는 행위는 엄청난 행위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먹는 행위는 내 몸속에 자연과 우주가 들어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먹는 행위는 내 몸속에 자연과 우주가 들어오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할 능력이 없으므로 하찮게 보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 마치 모든 생물의 세포에 DNA 코드가 있듯이 - 담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외국어가 내 안에 있을 때 외국어를 제대로 이해하듯이, 우리 눈에 아무리 하찮아 보이고 의미 없어 보이는 것(: 개꿈)에도 항상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것입니다.


<다섯 번째 비밀: 야곱의 꿈, 요셉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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